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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21세기 고전] 복종을 금지하고 제멋대로 말하자 - 박형서의 『자정의 픽션』

《경향신문》에 연재하는 21세기 고전. 이번에는 박형서의 ‘침 같은 작품’ 『자정의 픽션』을 다루었습니다. 이 작품, 참 입이 걸죠.^^ 자유롭게 해방된 말들이 넘쳐납니다. 야유와 풍자를 통해 울음을 만드는 기이한 미학이 여기에 있습니다. 




복종을 금지하고 제멋대로 말하자

박형서, 『자정의 픽션』(문학과지성사, 2006)


박형서는 아주 “막나가는” 작가다. 평론가 김형중의 말이다. 이 평가는 중요하다. 조심하고 절제하는 금욕을 통한 축적은 이 시대의 윤리가 아니다. 미리 쓰고 나중에 갚는 신용 있는 허풍선이야말로 찬양받는 시민의 모델이다. 발끝으로 더듬대고 눈치를 돌리면서 한껏 조심해 봐야 이곳에서 미래라 해 봐야 청년 실업과 중년 해고와 노인 파산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러니 카르페 디엠(Carpe Diem), 기성의 서사적 규칙에 따르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고 입으로 쏟아지는 언어를 즐겨라! 복종을 금지하고 제멋대로 말하자. 가령, 이런 식은 어떨까?

“‘어머니 어머니 사랑 아저씨두 나처럼 삶은 닭알을 제일 좋아한대.’ 하고 소리를 질렀지오. ‘떠들지 말어.’ 하고 어머니는 눈을 흘기십니다. 위에서 ‘달걀’은, 심지어 발음하는 것조차 어머니에게 제지당하고 숨겨진다. (중략) 작가 주요섭은 달걀의 미학을 이런 식으로 ‘벽장’ 속에 숨겨버렸다. (중략) ‘벽장’은 언제나 들키고 발각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결국 필자와 같이 잘난 연구자에게 들키고 발각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무의미한 미학에 지나지 않는다.”

『자정의 픽션』에 실린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의 한 부분이다. 소설로 논문을 놀리고 있다. 논문이란 무엇인가. 엄격한 이성으로 쌓아 올린 언어들의 고귀한 집합이다. 하지만 논문 속 언어들의 실체는 무엇인가. 시쳇말로 하면, 저자와 심사자와 편집자 세 사람만 읽는다는 비의의 언어가 아닌가. 검은색 관에 담긴 채로 거의 유통되는 죽음의 언어, 즉 ‘무의미한 존재 미학’이기 십상이다. 박형서는 소설을 논문으로 쓴다. 논문의 엄숙한 언어로 놀면서, 논문의 사회적 허구성을 놀린다.

언어의 인형술사답게, 박형서는 논문에 결박된 말들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잘난 연구자”를 ‘잘난 체하는’ 연구자로 해방한다. 순진무구한 주인집 소녀의 화법적 단순성을 발랑 까진 날라리의 음란성 가득한 알레고리로 성숙시킨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자신을 속이면서 더는 힘들게 살지 말라고, 막나가라고 권한다.

『자정의 픽션』에 실린 소설에는 아무 족쇄도 없다. 새의 언어로 쓰인 듯하다. 마치 자유전자 같다. 이야기의 궤도를 벗어나서, 이곳저곳 날아다니다 남의자리에 들러붙는다. 문장의 리듬에 눈을 맡기다 보면, 한없이 유쾌하고 무진장 즐거워진다. 카르페 디엠, 오늘의 언어를 즐겨라! 가령, 이런 건 어떨까?

“논쟁에서는 상대를 일부러 무시하고, 약 올리고, 극도로 불안하게 만듦으로써 실수를 이끌어내야 한다. (중략) 현 교수가 내게 한 짓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중략) 그는 내 의사를 묻지 않고 태국산 우롱차를 내왔다. (중략) 태국산 우롱차라고? 나는 그 정도로는 우롱당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과시하려고 뜨거운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논쟁의 기술」)

‘논쟁의 기술’은 논리의 기술이 아니다. 집요하게 물어뜯고 지저분하게 파고들고 지분지분 약 올려서 상대의 실수와 자멸을 유도하는 기술이다. 좋은 자리를 미리 선점해야 하는 건 물론이다. 이 소설은 두 대학교수의 심야까지 이어지는 격렬한 쟁론과, 그 쟁론에 대한 화자의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읽기가 아니라 시청에 가깝다. 소설 속 인물들은 침을 튀기고, 소설 밖 독자들은 침을 삼킨다.

소설이 정말 침 같다. 키스할 때를 제외하면, 침은 입 안에 있으면 달콤하나 입 밖으로 나오면 더럽다. 고고한 학자들 나누는 이야기 참 지저분하다. 『삼국지』의 한 장면이 배경이다. 장판파에서 조자룡이 펼친 대활약이 실재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리 주워섬기고 저리 둘러대면서 중간중간 다른 이야기까지 섞어가며 치열하게 치고받는다. 논쟁의 목적은 상대를 설득하는 게 아니다. 상대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다. 맥주에 치킨을 곁들여 호프집 매출을 올려주면서, 느긋이 대선 후보 토론 쇼를 시청했을 때를 떠올리시라. 이 치열한 논쟁의 끝자리는 어이없고 간략하다.

“말 위의 사내는 더더욱 목청을 높여 현 교수를 몰아세웠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연구실의 책장이 무너지고 벽에 금이 갈 것처럼 여겨졌다. (중략) 진정한― 그렇다. 그는 진정한 논쟁의 화신이었다. 나는 경외감을 가지고 그에게 굴복했다.”

창을 든 채 말을 타고 연구실로 틈입한 논쟁의 화신이, 즉 힘세고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것이다. 화자가 평생 단련해 온 논쟁의 기술은, 거기에 적수로 맞섰던 현 교수의 현란한 말솜씨는 이 엄연한 폭력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한 채로 무참히 허리를 베이고 말지 않았는가. 지식인의 불쌍한 허위성이여!

박형서의 소설을 읽는 사람은 반드시 엉덩이에 털이 난다. 깔깔거리고 웃다가 어느새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웃음의 비극’이라니. 이 작가의 재능은 유쾌함이 아니라 거짓으로 전락한 삶에 대한 깊은 애도에 있다. 아니, 뒤집혔다. 웃다가 슬픈 게 아니라 슬퍼서 웃음이 나오는 큰 역설. 이것이 박형서 소설의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