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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21세기 고전] 인생에 좌절은 있어도 패배는 없다 - 공선옥,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인생에 좌절은 있어도 패배는 없다

공선옥, 『내가 가장 예뻤을 때』(문학동네, 2009)



지하철역을 놓쳤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잠시를 못 참고, 또다시 책을 손에 잡은 탓이다. 허둥거리며 약속 장소로 뛰는데, 뒤가 궁금하면서 길 한쪽에 주저앉아 또 읽고 싶다. 처음 접하는 작품도 아닌데, 아무튼 이 지경이다. 이것이 공선옥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다. 조금도 편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마음의 장벽을 넘어온 문장들이 잔상을 남기면서 시선을 다음으로, 다음으로 잡아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톳불 위에서 고기가 익어 갔다. 제재소 마당에 유일하게 서 있는 목련나무 고목의 꽃망울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봄날 저녁, 그늘이 포근히 내리고 있었다. 그 마당으로 환이 나왔다. 환이 나오자 어두운 마당이 환해졌다!”

화자는 해금. 전라도 광주 산다. 나이는 고작 스무 살, 세상을 전혀 몰라도 좋을 나이다. 그러나 현실에도, 마음에도 조급한 어둠이 이미 자욱하다. 열아홉 살 봄의 유쾌함과 스무 살 눈부신 봄의 이 눈부신 환함 사이, 그러니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역사가 인생을 피로 습격한다. 5.18 광주 항쟁이 일어난 것이다. 내가 가장 예뻐서 더욱 참혹하고, 내가 가장 아름다워서 더욱 잔인한 시절이 흘러간다.

친구 하나는 총에 맞아 꽃잎처럼 스러지고, 친구 하나는 저수지에 몸을 던진다. 친구 하나는 집 나갔다 돌아와 아비도 없이 애를 낳는다. 친구 하나는 대학을 버리고 서울로 위장취업을 가고, 또 친구 하나는……. 해금은 친구의 산부인과 병원비를 마련하려고 지금 동분서주하는 중이다. 잔혹한 역사가 청춘의 한복판에 새긴 상처가 끝없이 말을 건넨다. 역사가 지르는 거대한 환청이, 죽은 자가 앞서고 산 자가 따르는 ‘임을 위한 행진’이, 그 장소와 그 시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완벽하게 뒤틀린 인생들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나는 너무 이상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중략) 공기 중에 누가 죽었든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밥 먹고 웃고 결혼하고 사랑하고 애 낳고 그러는 게 이상해.”

공선옥의 문장들은 정말 징글맞다. 심장이 베인 듯, 폐부를 찔린 듯, 참담한 현재를 한없이 줄짓다가 슬그머니 눈부신 기쁨을 아주 잠깐, 이어 붙인다. 문장들 사이에서 마음이 스스로 새겨가는 뭉클함이,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이면에서 기어이 사랑을 발굴하는 이 힘이 이야기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 일찍이 작가는 말했다.

“사람이 혼자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이 외롭거나 가난하거나 슬프거나 답답하거나 할 때 무엇이 그런 ‘슬픔’들을 덜 억울하게 할 수 있을까. ‘글’은 그런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방점은 “어떻게 해볼 수 없이”에 있다. 해금이 휘말린 역사의 소용돌이는 어떠했던가. 학살 다음엔 착취가 있고, 착취 다음엔 해고가 있고, 해고 다음엔 진압이 있고, 진압 다음엔 고문이 있고, 고문 다음엔 군대가 있고, 군대 다음엔 의문사가 있다. 앞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공할 폭력이 끝없다. 이 시절에 마음이 어둠에 먹히지 않으려는 이들은 정녕 필사적으로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 ‘작업’을 하고, ‘배달’을 나가고, ‘꽃병’을 나른다.(유인물을 등사하고 어둠을 틈타 집집마다 밀어 넣고 화염병을 던진다.) 하는 일마다 은유를 이룩하고, 신분을 세탁하는 환유를 실천한다. 문학이 있어야 권력과 싸울 수 있다.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언어를 괴롭히는 것은 오로지 문학뿐이기 때문이다. 

해금과 그 친구들은 분노, 좌절, 절망 등이 반들반들한 차가운 얼음 위에서 우정과 사랑의 연대를 아슬아슬 연기하는 피겨스케이터 같다. 연속 3회전의 눈부신 무대를 때때로 이룩하지만, 곧바로 얼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기도 한다. 불쌍한 현실을 견디지 못해서 아등바등 애를 쓰지만, 세상은 충분한 에너지가 쌓이지 않으면 들썩일 뿐 좀처럼 상태를 바꾸지 않는다.

“모든 좋은 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이, 행복이, 청춘이, 인생이, 인생의 환한 것들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이 세상에 슬픔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지속될 수 없으므로, 슬픔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변화가 이 세상의 본질이라면, 그 어떤 것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면, 역설적으로 어두운 것도, 슬픈 것도, 아픈 것도, 불행한 것도 결국 사라진다. 그때까지는 짧은 기쁨을 중첩해 가면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아스라이 결을 더듬던 작가가 마침내 언어의 힘줄을 세게 당긴다.

“바람 앞에 선 들꽃처럼 몸을 잔뜩 움츠리기도 하면서, 그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청춘은 조금씩 단련되어 가리라. 기필코 살아서, …… 굳세게 살아서 마침내 아름다워지고 말리라.”

청춘의 언어가 끓어오른다. 인생에 좌절은 있어도 패배는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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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 연재하는 21세기 고전 이번에 다룬 작품은 공선옥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문학동네, 2009)입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지난 한 해 넘게 한 달에 한 번 한국소설을 읽어 오는 게 행복했습니다. 대부분 예전에 읽었던 것이었지만, 시간이 흘러서 다시 읽는 건 또 다른 경험이니까요. 문학작품을 읽는 일이야말로, 제 인생에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다른 기회가 또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