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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어느새, ‘회사 인간’

한 달에 한 번, 《중앙선데이》에 쓰는 칼럼입니다. 카프카의 『변신』을 통해 회사에 길들여진 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느새, ‘회사 인간’



연초에 휴가를 갔다. 새벽 5시, 여명이 있기도 전에 저절로 눈이 뜨인다. 느긋한 게으름을 피우자고 마음먹은 것도 별무소용이다. 신체가 제멋대로 움직인다. 어둠 속에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작은 등을 켜고 가져간 책을 읽는다. 가족들 숨소리가 고르다.

회사를 나왔을 때도 한참 그랬다. 몸을 추스르려 동생이 사는 시골마을로 내려갔다. 굳이 출근할 필요가 없는데도, 아침 8시면 몸이 지하철에 출렁이는 것 같고, 12시에는 어김없이 배가 고프고, 오후 4시에는 무조건 지루하고, 7시가 되면 술 벌레가 창자를 건드렸다. 어쩔 수 없음을 알지만, 나는 여유와 한적을 즐기지 못하는 이 몸이 무서웠다.

『변신』에서 프란츠 카프카는 자동화된 인간의 삶을 폭로한다. 카프카가 비탄한 것은 테일러식 관리 시스템, 즉 회사의 효율을 위해 ‘자기 시간을 온전히 넘겨 버린 삶’이다. 이것은 노예화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독일의 문학비평가 보그달은 말한다. “권력과 지배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규칙에 따라서 움직인다. 이 규칙을 너무 오래 수동적으로 따른 자는 결국 이 규칙에 의해 소멸된다.”[각주:1]

어떤 사람이 한 조직에 속해 성공적으로 일할수록, 몸은 회사기계와 같은 리듬을 탄다. 기계와 한 몸이 되어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연동한다. 외판사원답게 그레고르 잠자는 기차시간표를 따른다. 어렵지 않다. 기계는 차갑고 합리적이다. 누구나 규칙을 익혀, 몸속시계를 고쳐갈 수 있다.

그레고르는 “날이면 날마다 출장”을 가는 “힘든 직업”을 살아간다. “불규칙하고 질 나쁜 식사, 항상 바뀌는 탓에 절대 지속될 수도, 결코 정들 수도 없는 인간관계 등”을 불평하면서도, “악마가 이 삶을 모두 쓸어가라지!” 하고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휴일에는 “기차시간표를 연구”한다. 연인과 사랑을 나누거나 가족과 온정을 쌓을 시간마저 바쳐 그는 스스로 효율을 높여가는 인간기계로 진화한 것이다. 권력은 억압이 아니라 자율을 통해 작동한다.

오늘날엔 모바일 기기들이 인간을 ‘정보의 수용기’로 만든다. 많은 이들이 문자 등을 통해 사적 시공간까지 파고들어오는 24시간 업무지시를 끔찍해한다. 하지만 몸은 간사하다. 의식과 상관없이 반사를 일으킨다. 시골마을에서 나는 어떠했던가. 더 이상 오지 않는 이메일을 습관적으로 확인하고, 빗발치는 전화를 받지 않는 나를 어색해 하고, 서서히 줄어드는 문자를 낯설어한다. 어느 날은 나라도 먼저 연락해야 할 것 같아 스마트폰을 들었다 놓는다. 한밤중에 알림음이 울리는 환청을 듣고, 머릿속으로 멋진 기획서가 떠올랐다 사라진다. 

아아, 이것이 정녕 삶이란 말인가. 나는 회사와 고리가 끊어진 후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이 몸에 자부를 느끼고, 쓸데없이 호르몬을 분비하고 흥분하는 이 몸이 정말 불편하다. 특정한 회사에 맞추어 최적화된 이 몸의 작동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새로운 인생’은커녕 ‘새로운 사업’조차 시작할 수 없다. 인간적 모멸과 비참한 희생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레고르는 스스로 벌레로 변하지 않았던가.

인간이 벌레가 되었다 해서 삶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인생이 끝나고 충생(蟲生)이 시작된 것뿐. 학교에, 군대에, 회사에, 살림에 들어갔을 때, 하나의 생이 끝나고 전혀 다른 생이 시작되듯, 어차피 삶이란 꾸준히 죽음과 재생을 반복하는 것 아닌가. 그레고르는 훌륭했다. 기어 다니면서 벽을 길 삼는 편리함과 천장에 매달리는 아늑함을 어느새 익히고 즐기지 않았던가. 낡은 근육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몸을 세울 적마다, 그레고르는 놀라운 희열과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충생을 살아간다고 인생이 소실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것은 더 높이 돌아온다. 벽에 길을 내고 천장에 둥지를 튼 몸에서 음악 듣는 귀가 솟아난다. 누이의 바이올린 소리에 홀려 그레고르는 말한다. “음악이 그를 이렇게 사로잡는데도 그가 동물이란 말인가? 마치 간절히 바랐던, 미지의 양식에 이르는 길이 그에게 나타난 것만 같았다.”

익숙한 양식을 버리고 미지의 양식을 실현할 때 삶은 작품이 된다. 그레고르는 기차 시간표의 명령에 따라 살다 보험금 지급 증명서로 죽는 사물의 삶을 거부하고 무한한 해방감 속에 벌레의 삶을 선택한다. 하지만 탈피를 거쳐 새로운 삶에는 이르지 못하고 무참히 실패한다. 누이는 경제적 효용을 상실한 그레고르를 ‘오빠’가 아니라 ‘괴물’로 규정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것을 판결한다. 낙심한 그레고르는 방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하고, 사체는 아무 애도도 없이 물건처럼 처리된다.

그레고르의 이 삶은 정녕 실패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따랐어도, 어차피 우리의 삶과 죽음은 ‘사물화’되어 있다. 전혀 다른 몸을 연습하고, 또 다른 삶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단 한 번뿐인 우리 인생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밝아오는 새벽 첫 빛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어쩐지 등이 딱딱해지는 것 같다.



  1. 클라우스미카엘 보그달, 「20세기의 알레고리는 경악의 알레고리? ―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을 중심으로」, 정혜연 옮김, 《외국문학연구》 제18호(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2004), 17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