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직(職)/책 만드는 일

‘될 만한 책’이라는 사고방식을 넘어서

《기획회의》 여는 글로 쓴 글입니다. 출판 현장의 여러 선후배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될 만한 책, 어디 없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입에 올립니다. ‘한 방’이라고 바꾸어도 좋을 겁니다. 저는 항상 이 말이 어떤 역사적 조건에서 이 같은 자연스러움을 얻었을까를 고민하곤 했습니다. 잘 팔리는 책을 기획하는 것은 물론 출판 사업의 핵심이지만, ‘될 만한 책’이 사업 운영의 중심에 서는 출판은 적어도 직원들과는 함께 오래 갈 수 없습니다. 회사의 장기적 가치가 생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괜찮은 출판사의 연매출이 소기업 수준에 대부분 머무르는 이유도 출판사업의 기본 구조가 이 말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얼마전 SBI 학생들이 출판계에 입문하기 위한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가볍게 적어 보았습니다.

   



‘될 만한 책’이라는 사고방식을 넘어서


출판 노동을 생각할 때, 모두 장시간 노동에 저임금을 우선 떠올리곤 합니다.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2015년 말 출판 실적이 있는 출판사 2,428군데 중 1~5종을 출간한 곳이 1,281군데입니다. 비율로 52.8%입니다. 실적 출판사 전체의 절반이 넘습니다. 차상위인 6~10종을 낸 출판사 391군데까지 합치면 무려 69.1%에 달합니다. 책을 내는 출판사 10곳 중 7곳이 소형 출판사인 셈입니다.

『2015 콘텐츠산업통계』(한국콘텐츠진흥원)에는 단행본 출판에 해당하는 서적출판업 종사자와 교과서 및 학습서적 출판업 종사자 숫자를 더해서 2014년 말 현재 24,269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한 출판사에 소속된 종사자 숫자가 10명이 채 안 됩니다. 경영진을 제외하고 직원 숫자만 따지면 더 줄어들 겁니다. 교과서 및 학습서적 쪽이 규모가 조금 커서 종사자 숫자가 평균 21.4명 정도이고, 단행본 쪽은 평균 5명 정도밖에 안 됩니다. 단행본의 경우, 경영진을 1명만 잡아도, 직원 숫자는 4명 이하로 줄어듭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기업의 영세성은 노동조건의 열악함과 곧장 연결됩니다. 설령 개별 회사의 노동조건이 좋아서 직원들 만족도가 아주 높더라도, 이는 물적 토대와 별 관련이 없는 경영자의 주관적 선택, 즉 시혜일 가망이 높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약탈과 재분배’라는 봉건적 질서에서도 성군(聖君)은 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는 이후의 역사가 확연히 보여 주듯, 지속 가능하기 아주 어렵습니다. 출판이 시장에 편입된 이상, 이 회사의 생존은 오히려 불안정해서 ‘제때에 한방 터져야’ 하는 압박이 더욱 가중될 뿐입니다. ‘지속성의 불안’이라는 덫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출판에 대한 모든 담론에는 나름의 역사성이 있습니다. 영속적인 게 아니라 특정한 사회 현실이 낳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출판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에는 모든 가능성이 열립니다. ‘지속성의 불안’을 모두가 입에 담지만 사실은 아무도 현실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머리를 쓰면, 곳곳에 황금알을 낳는 닭이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거인과 마주치는 건 피할 수 없더라도, 많은 이들이 콩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알토란같은 보물을 건져오곤 했습니다. 따라서 성공 케이스가 널린 만큼, 아주 오랫동안 한 방이 터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출판인들이 ‘될 만한 책’을 습관적으로 입에 담게 된 것은 실제로 그 모델이야말로 가장 현실성 높고 생산성과 수익성마저 확실한 사업모델이었기 때문입니다.

출판에 대한 정상적 담론을 모조리 삼켜 버린 ‘한 방’(그 현실적 크기와 별 상관없습니다)에 대한 끈질긴 집착, 거기에 더해서 데이터에 근거를 둔 현실 분석을 무시하고 “내가 너 정도 될 때는”으로 시작하는 연설부터 늘어놓는 경험 중심적 태도의 만연 등 한국출판의 고질에는 역사적 실체가 분명히 있습니다. ‘한 방’이 확률적으로 자주 일어난다면, 회사의 생존을 장기적으로 보장하는 지속 가능한 출판 시스템을 고민하는 것조차 바보 같은 일이 되니까요. 사전사후의 분석이 필요 없는, 파도에 올라탄 것처럼 그때그때 묘기를 잘 부리는 쪽이 오히려 훌륭한 선택이지요. 게다가 출판 영업을 통한 이익 확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부동산 수익률은 모두의 이성을 마비시켰지요. 

성숙기를 이미 넘어선 출판을 ‘지속성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건 아마 ‘될 만한 책’이나 ‘한 방’은 아닐 겁니다. 콩나무 탈 날만 기다려 구름 위에 있는 거인의 집을 기웃대는 잭은 이제 퇴장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출판이 ‘지속성의 불안’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오늘날과 같이 미디어 소유가 편리한 세상에서, 출판은 (저자든, 편집자든, 독자든) 인적 자원의 고갈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요즈음 《기획회의》는 한국출판에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을 갖가지 사고 도구들을 제공하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이번 호에 독자 여러분께 소개하려는 것은 ‘하이 콘텍스트’입니다. 초연결사회에서는 아주 빠른 속도로 거대한 콘텍스트가 형성되는 데다, 독자들은 콘텐츠보다 콘텍스트에 더 주목하는 경향을 보이곤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알 수만 있다면, 출판은 분명히 ‘지속성의 불안’을 해소하고, 조직을 안정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길을 발견할 겁니다. 애독을 부탁드립니다.


왜 하이콘텍스트 출판인가 /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하이콘텍스트 시대의 특징적 프로세스 / 김성신(출판평론가) 독자의 맥락적 소비를 이끄는 입소문 마케팅 전략 / 박주훈(스토리웍스 컴퍼니 대표) 우연과 전략을 연결하라 / 문보배(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