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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문화일보 서평] 동물원에서 인간과 역사를 성찰하다 _나디아 허의 『동물원 기행』(어크로스, 2016)

이번 주에 읽은 책은 대만의 소설가 나디아 허의 『동물원 기행』(남혜선 옮김, 어크로스, 2016)입니다. 동물원의 역사를 통해, 동물과 인간이 맺어온 관계를 탐색하는 책입니다. 동물원 마니아로서 기회 닿으면 이런 기행을 다녀서 글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러웠다는 뜻입니다. 지면 관계상 조금 줄여서 실렸기에, 아래에 《문화일보》 서평을 원본대로 옮겨 둡니다. 



아름다운 문체로 쓰인 글을 읽으면 언제나 질투부터 난다. 특별히 그 문체가 풍요로운 지식과 신선한 감각과 예리한 통찰을 한꺼번에 견디려고 이룩된 것일 때에는 속에서 불이 솟는 기분이 든다. 거기다 나이까지 나보다 어리면 신진을 만난 기쁨과 헛삶에 대한 슬픔이 섞이면서 만감을 불러일으킨다. 대만의 젊은 소설가 나디아 허의 『동물원 기행』은 이 세 가지 조건에서 정녕 한 치도 모자라지 않은 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두 해에 걸쳐 전 세계 동물원 열네 곳을 찾아 떠난 여행을 기록한 것이다. 런던에서 시작한 저자의 발걸음은 파리와 베를린, 로마와 몽펠리에를 거쳐 싱가포르를 경유지로 겪은 후 다시 중국의 베이징, 상하이, 하얼빈, 타이베이에 이른다. 황제나 귀족의 사적 공간으로서 세상의 기기묘묘한 동물들을 모아 놓은 동물원은 오랜 역사가 있지만, 대중들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공공시설로서의 동물원은 근대의 확실한 발명품이다.

저자가 찾았던 각각의 동물원에는 전 세계 각지에서 동물을 수집하는 과정과 관련한 제국주의적 침략과 폭력의 역사가 있고, 특권 계급이 자율적/타율적으로 시민들한테 그 공간을 개방했던 혁명의 역사가 있고, 근대 과학의 전개와 멸종 동물의 보전과 연계된 수많은 분투가 있고, 인간과 동물 사이에 있었던 온갖 드라마들이 있다. 저자의 말처럼, “동물원은... 그 시대의 흐름을 담아낸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 어떤 건물들보다도 훨씬 더 진실하게 그 도시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동물원 2집의 음반 표지에 적힌 “언젠가 내가 두고 온 꿈들이 자라고 있는 곳”이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는 구절이다. 이처럼 동물원은 사람들이 살아온 자취를 미시적인 방식으로 기억하고 환기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동물원을 통해 한 도시의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면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기예를 보여준다. 가령, 남프랑스의 몽펠리에 동물원은 ‘느림’을 즐기면서 사는 카탈루냐 사람들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식으로 꾸며졌다. 여기 가려면 우선 ‘천천히, 천천히’라는 말부터 익혀야 한다.

살바도르 달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이야기했던 페르피냥 철도역에서 차표를 사는 일부터가 일단 난관이다. 단순히 목적지와 시간만 말하는 것은 인생을 즐길 줄 모르는 무례한 일이다. 매표원과 두런두런 일상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행에 나서는 이유와 마음에 품은 여정을 모조리 털어놓고, 그에게 적당한 노선과 좌석을 추천받는 사람들을 참을 줄 알아야 한다. 

“효율에 대한 모든 욕구를 포기한 채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여유롭게 줄을 서서” 기차역의 시간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거기로부터 한 시간 반 정도 가면, 종착역에 “아무 일 없이 평화롭고 온화한 아름다움이 가득한 풍경”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가장 느긋한 동물원”인 몽펠리에 동물원이 있다. 

이 동물원은 인위적 시설물을 거의 두지 않는 방식으로 설계되었기에 한 10분 정도 자갈길을 걷다 보면 동물원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곳이다. “일상이 곧 휴가”이고자 하는, 일찍이 조지 오웰이 “가능하다고만 생각하면, 오늘 할 일을 ‘마냐나’로 미룬다”고 했던 카탈루냐 사람들다운 동물원이다. ‘마냐나’는 다음날 아침이라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소개된 열네 곳의 동물원도 각각 매력적이지만, 사이사이에 삽입된 단막극들이 읽는 맛을 더한다. ‘핑크 플로이드의 돼지’ ‘투우사의 붉은 피’ ‘수상한 토끼들’ ‘개 같은 사랑’ ‘모비딕의 부활’ 등의 이름이 붙은 이 간주곡들은 문학, 철학, 음악, 영화, 연극 등을 넘나들면서 동물과 인간의 만남이 빚어낸 문화의 의미를 우아하게 탐구한다. 무엇보다 헤밍웨이, 업다이크, 멜빌, 관한경, 장아이링 등 동서양 문학의 고전에 나타난 여러 동물 표현(비유)들을 실제 동물의 생태와 연결해서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성찰을 제공하는 점은 아주 개성적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 

“인생은 늘 개차반 같다. 사랑은 개 같고. 사랑은 한 사람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마음과 공생하고, 미친 듯이 짖어대며, 사납게 먹잇감을 찾는다. 사랑은 언제나 피비린내 나는 선천적인 조건에 제한을 받으며, 그냥 부속품에 불과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인생 그 자체다.”

개인적 체험에 비추어볼 때, 미술관이나 영화관 이상으로 동물원은 자기 삶을 돌이킬 수 있는 적극적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아마도 동물이 절대적으로 낯선 타자로서 존재하면서 우리에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강렬하게 환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동물원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조심해야 할 것도 있다. 갇힌 동물들에 대한 어설픈 연민에 빠지지 않는 것. 그보다는 차라리 동물원이라는 공간을 마련하여, 인간과 동물을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붙잡아 놓은 힘에 대하여 사유하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언제나 깨어 있는 것, 격정에 휘둘리지 않고 사고하는 것, 싸구려 동정과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낯선 도시에 갈 때마다 그곳의 자연사 박물관이나 동물원을 찾곤 하는 소소한 마니아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책이 나온 것이 반갑고 또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