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 공자가 진나라에 있을 때 말했다. “돌아가야겠구나! 돌아가야겠구나! 내 고향 젊은이들은 뜻은 크디크고 문장은 빛나지만 이를 마름질할 줄 모르는구나.” 子在陳, 曰, 歸與! 歸與! 吾黨之小子, 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
거대한 물길을 앞두고 이렇게 말한 후, 공자가 고향 노나라로 돌아가 젊은이들을 가르치려는 결심을 한다. 그로부터 ‘스승과 제자의 탄생’이라는 공자의 진짜 혁명이 시작된다. 공자는 세상에서 정치를 통해 직접 뜻을 펴려 했으나 오랫동안 부질없이 천하를 떠돌았을 뿐이다. ‘상갓집 개’라는 비웃음을 들을 정도로 적절한 시대를 만나지 못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공자는 떠돌아다닌 지 열네 해 만에 진나라에서 마침내 더 이상 정치로는 뜻을 펴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때마침 노나라에서도 계환자가 죽으면서 아들 계강자에게 공자를 다시 불러들려 나라의 중흥을 이루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공자에 대한 정치적 사면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라가 기울던 노나라로서는 어쩌면 공자 자신보다 공자를 따르던 수많은 제자들을 등용해 인재로 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자는 더 이상 세상을 떠돌기보다는 고향으로 돌아가 새롭게 후세를 도모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공자의 귀국은 대부 공지어의 반대로 인하여 그로부터 세 해 뒤에나 이루어진다. 먼저 제자인 염구(冉求)가 등용되어 기반을 조성한 다음이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주목할 부분은 공자의 귀국과 정치적 재기만은 아니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공자가 돌아가서 해야만 하겠다고 다짐한 일이다. 이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질문하도록 만든다. 도대체 뜻은 거칠지만 웅대하고, 공부도 빛이 날 정도로 잘하지만, 마름질할 줄 모른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뜻하는가? 나는 오랫동안 이 구절을 접할 때마다 이를 고민해 왔다. 그러다 한 젊은이의 글에서 작은 힌트를 얻었다.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라는 책에서 저자 김해완은 이야기한다. “내 고민은 이것이었다. 진보적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왜 나의 삶은 진보적이거나 자유롭지 않을까? 좋은 책과 품성 좋은 선생님들 밑에서 진보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권위를 악용하는 사람도 없었고, 교복을 착용하거나 무책임한 체벌 때문에 억압받은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내 일상은 보람차기보다는 무기력했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좋은 사람들에게 좋은 생각들을 배웠는데 왜 정작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질까? 이 진보적인 환경에서 아무리 해도 나는 ‘의식 있는 진보 청년’이 될 수 없었다. 학교에서 배운 말은 내 말이 되지 않았다!”
청년 김해완이 품은 뜻은 거칠어 보일지라도 넓고 크다. 호연의 기가 느껴질 정도로 패기 차다. 그는 좋은 말을 듣고 훌륭한 글을 읽어 그 마음에 담은 바가 아름답게 겉으로 드러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의 삶 자체가 바로서지는 못했다. 마음속에서 일류 대학에 대한 갈망이 끝없이 일어났으며, 스타벅스 커피가 그의 혀를 사로잡았다. 그는 올바른 삶을 갈망했으나 쉽게 세속의 유혹에 굴복했으며, 때때로는 차라리 그 삶을 갈망했다.
공자가 “고향의 젊은이들이 마름질할 줄 모른다”는 말로 가리키려 한 것이 아무래도 이와 비슷한 상태이리라. 공부는 했으되 삶으로 완전히 옮겨 붙지 않은 것, 배우기는 했으나 아직 때에 맞게 익히지 못한 상태 말이다. 그러면 그 마음에 답답함과 암울함이 찾아온다. 우울과 분함이 정신을 사로잡아 앞으로 나아갈 길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대로 살아가자니 배운 바와 어긋날까 두렵고, 배운 대로 살자니 앞날이 캄캄하다. 공자는 고향으로 돌아가 젊은이들의 이런 울분을 풀어주어 곧바른 삶의 길을 세울 수 있도록 가르침을 베풀고 싶어 했다. 병아리가 세상을 궁금해 하면서 알껍데기를 쪼는 순간에 바깥에서 부리를 들어 같은 곳을 쪼는 어미 닭이 되고 싶었으리라. 넉넉히 배워 바탕이 이룩된 젊은이들을 가르쳐 군자로서 성숙시키는 위대한 사명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젊은이를 군자로 성숙시키는 길은 도대체 무엇일까. 공자는 그 가르치는 길로 인(仁)을 품은 덕(德)의 실천, 곧 충서(忠恕)를 떠올렸다. 스승이 스스로 본이 되고, 동시에 제자의 삶에 뛰어들어 함께하자고 하는 것, 마음을 닦아 자기 인함을 이루고, 그 인함을 바깥으로 펼쳐서 덕으로써 교화하는 스승-제자 관계의 혁명이 이 말과 함께 움텄다. 동아시아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힘이 발원했다.
자재진(子在陳), 왈(曰), 귀여(歸與)! 귀여(歸與)!
진나라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순임금의 후예를 찾아서 봉한 곳이다. 여(與)는 감탄을 나타내는 말이다. 주희는 이 말을 공자가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다 도가 행해지지 않자 한탄하면서 한 말로 보았다. 사마천은 계강자가 염구를 초빙하고, 염구가 막 떠나려 한 기원전 491년의 어느 날에 이 말을 배치했다. 정치적 망명자였던 공자는 이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국인 노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사면을 얻은 상황을 보여준다.
오당지소자(吾黨之小子), 광간(狂簡), 비연성장(斐然成章), 부지소이재지(不知所以裁之).
오당지소자(吾黨之小子)는 고향인 노나라의 젊은이 또는 문하생을 말한다. 다섯 집(家)을 비(比)라 하고, 다섯 비(比)를 여(閭)라 하고, 네 여(閭)를 족(族)이라 하고, 다섯 족(族)을 당(黨)이라 한다. 따라서 당은 오백여 집으로 이루어진 큰 마을을 말한다. 주희에 따르면, 광간(狂簡)은 “뜻은 크지만 일에는 소략함”[志大而略於事]을 뜻한다. 김용옥은 광(狂)을 “서투르나 닳아빠지지 않은 모습이요, 문명의 억압에 짓눌리지 않은 패기나 의욕을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했다. 리링에 따르면, 간(簡)은 뜻이 큰 것을 형용한 말이다. 단지 간략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뜻을 품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왜 하필이면 공자는 제자의 자질로서 광(狂)을 택했을까? 주희에 따르면, 미친 선비는 바름을 잃지 않도록 바로잡아 주면, 뜻이 이미 높으므로 도에 나아갈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비연(斐然)은 문채가 나는 모양으로, 교양이 겉으로 은은히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성장(成章)은 예악을 잘 닦아 내실이 있다는 뜻이다. 김용옥은 장(章)을 “문명이요, 질서요, 교육을 거쳐 함양된 교양인의 모습”으로 보았다. 재(裁)는 마름질, 즉 잘라서 바르게 하는 것이다. 다산은 “제자들의 학문이 비단같이 아름다운데, 마름질할 줄 몰라서 옷이 완성되지 못하는 것과 같으므로 돌아가 가르쳐서 이를 완성하도록” 돕겠다는 뜻을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배병삼은 문장은 이루었으되 아직 마름질할 줄 모르는 그 틈새야말로 스승이 절실히 요구되는 자리라고 했다. 문장을 이룸은 질문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요, 마름질할 줄 모른다 함은 아직 답을 갖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리링은 『사기세가』를 근거로 이 문장의 주어를 공자로 보고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한탄한 것으로 풀이했다. 하지만 김용옥은 설령 그렇게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제자들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마름질해 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표현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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