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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논어 공부

[시골마을에서 논어를 읽다 5] 삼성오신(三省吾身) _세 가지로 내 몸을 반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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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자가 말했다. 

“나는 매일 내 몸을 세 가지로써 반성한다. 남을 위해 일을 꾸미면서 충성을 다하지 않았는가? 벗과 더불어 사귀면서 믿음직하지 않았는가? 전해 받은 바를 익히지 않았는가?”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증자 초상


증자왈(曾子曰)

증자(曾子)는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 말년의 제자입니다. 공자보다 마흔여섯 살 어렸습니다. 이름은 삼(參)이고, 자는 자여(子輿)입니다. 아버지 증점(曾點)도 공자의 제자였습니다. 공자 사후에, 유약과 함께 내면적 성찰과 수신을 중요시하는 학파를 이끌었으며, 점차 영향력을 발휘해서 유가(儒家)의 틀을 완성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리쩌허우는 증자를 “유학에 종교적 도덕을 도입한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

성(省)은 스스로 살피는 행위입니다. 신(身)은 ‘육체’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말합니다. 형병(邢昺)을 좇아서 삼성(三省)은 ‘세 번 반성한다’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정약용도 이를 따랐습니다. 물론 이때 세 번은 ‘세 차례’가 아니라 ‘여러 번, 자주’라는 뜻입니다. 옛 사람들은 ‘삼’을 완성의 숫자로 보았으므로, 삼이라는 숫자는 ‘많이’라고 새겨야 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이어지는 문장이 반성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으므로, 단지 여러 차례 반성한다고 새기는 것은 옳아 보이지 않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 자신을 돌이키더라도 ‘무엇’을 성찰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주희의 해석을 좇아, 삼성은 세 가지 측면에서 나날을 돌아본다고 보는 게 그럴 듯합니다. 그렇다면 왜 세 가지 측면만 이야기했을까요? 맹자에 따르면, ‘약수(約守)’, 즉 (인을 행할 때)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집약하고 마음속으로 늘 돌이켜 따져서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곧 충(忠)과 신(信)과 습(習)이다. 그러나 김도련은 ‘삼성’의 ‘삼’과 뒤에 세 가지 일을 나열한 것은 우연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여전히 ‘삼’이란 ‘횟수의 많음’을 뜻한다고 보았습니다. 만약 ‘세 가지’만을 지칭하려 했다면, ‘오일성자삼(吾日省者三)’이라고 했으리라는 것이지요. 고전의 해석은 정말 어렵네요.


위인모이불충호(爲人謀而不忠乎) 

『설문해자』에 따르면, 충(忠)은 지극히 삼가는 것[敬]입니다. 주희는 진기(盡己), 즉 남김없이 나를 그 일에 쏟아 넣는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배병삼은 이를 ‘참되다’로 옮겼습니다. 


여붕우교이불신호(與朋友交而不信乎) 

신(信)을 주희는 ‘실(實)’, 즉 성실함이라고 풀었습니다. 김도련의 해석에 따르면, “자기가 한 말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입니다. 


전불습호(傳不習乎)

이 문장은 풀이하기 까다롭습니다. 하안(何晏)은 증자가 스승의 입장에서 한 말로 보고, 이 문장을 “(제자들에게) 학문을 전할 때 익숙하지 않았는가”라고 풀었습니다. 그러면 습(習)은 충(忠), 신(信)과 짝을 이루는 말로 ‘익숙하다’ ‘능숙하다’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개 이 문장에서 전(傳)은, 주희를 좇아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으로, 습(習)은 ‘몸에 익숙하게 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정약용은 ‘위로부터 이어받고 아래로 접하는 데 통용할 수 있는 말’이라면서 주자의 입장에 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