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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걷는 생각

알렉산더 칼더 전시회(리움미술관, 2013)를 다녀오다

Scarlet Digitals, 1945 Sheet Metal, Wire, and Paint, 215.9x241.3x104.1cm, Calder Foundation, New York ⓒ 2013 Calder Foundation, New York / 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 (리움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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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다. 딸아이와 함께 한남동 리움 미술관에서 알렉산더 칼더의 전시회를 구경하고 온 지도. 느낌은 점점 희미해지고 기억은 갈수록 사라져만 간다. 문자 중독자로 오래 살아온 탓인지 그림이나 사건이 주는 어떤 시각적 충격도 문자화하지 않으면 두 달도 못 가서 고스란히 증발해 버린다. 본래는 다른 글을 쓰려고 앉았지만, 컴퓨터 옆 독서대에 칼더 전시회 브로셔가 놓여서 재촉하는 바람에 전시장 메모들을 급히 정리해 글을 올린다.

전시회 브로셔에 따르면, “알렉산더 칼더(1898~1976)는 움직이는 조각, 모빌을 창조하여 현대 조각의 혁신을 이끌었다. (중략) 그는 1920년대에 파리에 머물면서 몬드리안과 미로, 뒤샹, 아르프 등 당시 파리 미술계를 이끌던 작가들과 교류하며 추상 미술과 초현실주의 같은 당대 최신 미술 경향을 접하고 크게 영향받았다. 칼더의 가장 대표적인 작업인 모빌과 스태빌은 칼더의 예술적 재능과 동시대 아방가르드 미술, 움직임을 구현하는 그의 공학적 지식이 조화를 이루어 탄생한 20세기 최고의 혁신적 조각이다.” 

나는 브로셔의 최고라는 말 따위는 믿지 않는다. 예술가의 작업에 비교급은 없다. 예술적 충격, 경험의 재배치, 자아의 새로운 균열과 재접합 같은 것이 있을 뿐이다. 최고의 혁신은 모르겠으나, 칼더의 작업에 혁신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가느다란 철사들, 가위로 오린 듯한 철판 조각들, 허공에 매달린 끈들, 때로는 기둥으로 때로는 받침으로 쓰인 나무들을 통해 칼더는, 인류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조형적 구조체(조각)를 새롭게 재구축한다. 때때로 보이는 물감의 터치나 시각적 구성은 확실히 몬드리안이나 미로의 그림에서 왔다. 그러나 그 색깔들은 신기하게도 평면이 아니라 공간 속에 놓여 있다. 그것은 회화와 조각의 진자 운동, 조각 속으로 파고든 회화이자 회화 속으로 파고든 조각처럼 느껴진다. 


노란 배경의 오브제(Object with Yellow Background, 1936) 합판, 철판, 끈, 물감 156.8 x 101.6 x 55.2 cm Honolulu Museum of Art; Gift of Mrs. Theodore A. Cooke, 1962(3014.1) ⓒ 2013 Calder Foundation, New York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리움 홈페이지에서)


운동이 처음부터 기획된 게 아니라, 회화의 선이 3차원 공간 위에 배치되면서 선을 위한 물질적 재료로서 철사가 호명되고, 그로부터 우연히 운동이 생겨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지로서 운동을 만들어 내기, 고정으로부터 움직임을 생성하기. 그다음에는 철사의 굵기, 구부러짐 같은 것을 통해 움직임이 더 강렬하게 의식되고, 마침내 모빌 그 자체를 위한 행위가 하나의 예술 행위로서 구현된다. 

모빌(Moblies)이란 말은 뒤샹이 명명한 것이지만, 참으로 적절한 말이다. 모든 예술은 운동과 정지를 다룬다. 순간 속에서 영원을, 덧없음 속에서 영속하는 것을, 운동 속에서 정지를 다룬다. 그러니까 반대쪽도 가능하지 않을까. 영원 속에서 순간을, 영속하는 것 속에서 덧없음을, 정지 속에서 운동을 다루는 예술. 그게 칼더의 작업이었다면 모빌이라는 말은 분명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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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셔에 따르면, 리움이 기획한 이 전시회에는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 118점을 구경할 수 있다. 칼더 작품 세계의 중핵에 있는 모빌과 스태빌은 물론 그 근원이 되는 초기 철사 작품 및 회화들, 공공 장소에서 이루어진 후기의 거대한 조각들도 볼 수 있다.


서커스 장면(Circus Scene, 1929) 철사, 나무, 물감(Wire, wood, and paint) 127 x 118.7 x 46 cm ⓒ 2013 Calder Foundation, New York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리움 홈페이지에서)


초기의 철사 작품을 보고 나서 느낀 첫 번째 인상은 천진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장난하면서 대충 만들어 노는 장난감 같았다. 예술가란 항상 어린아이의 눈으로 돌아가 사물을 응시하는 법이지만, 칼더의 경우 그 마음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 작품에 명랑성을 불어넣는다. 위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느다란 철사가 표현해 낸 서커스 단원들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함께 어디에선가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예술에서는 정지도 운동이다. 작품이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관계없이 작품은 늘 운동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작품이 움직이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는가. 전시장 한쪽 벽에는 다음과 같은 칼더의 말이 붙어 있다.


운동감은 오랫동안 회화와 조각의 기본 구성 요소의 하나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니 조각이 움직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한 직선 운동, 회전 운동이 아니라 서로 다른 유형의 여러 가지 움직임들의 속도와 진폭이 하나의 전체적인 결과를 형성하는 움직임 말이다. 색체나 형태도 구성할 수 있듯이, 움직임으로도 구성할 수 있다. (1933)


자연이나 생물이 아니라 인공물이 혼자서 움직인다는 것은 증기기관 이후, 그러니까 기계 시대의 상상력이다. 칼더의 작품들은 현대성의 한 극단에 있다. 예술가란 모든 곳에서 예술을 발견하는데, 칼더는 공학 속에서 마침내 그의 예술을 찾아낸 것이다. 


무제(Untitled, 1934) 철판, 철사, 납, 물감 287 x 172.7 x 134.6 cm ⓒ 2013 Calder Foundation, New York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리움 홈페이지에서)


공학 자체가 곧바로 예술이라는 것, 공학적 사유가 어떤 변형도 없이 예술적 사유라는 것. 이게 정말로 중요하다. 칼더 본인은 “모빌은 삶의 기쁨과 경이로움으로 춤추는 한 편의 시”라고 말했고, 그의 작품이 일종의 시적 상태를 지향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시적 상황을 구축해 가는 단단한 공학적 사유, 이것이야말로 현대 예술의 진짜 출발점이자 칼더로부터 시작한 어떤 혁신의 정체이다. 


나는 작은 끝부분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무게 중심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균형을 잡아 간다. 무게 중심은 단 한 군데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작품이 자유롭게 매달려 있거나 회전하려면 이 지점이 정확해야 한다. 보통 나는 철사를 구부려 매달기 전에 끈으로 이 무게 중심을 시험해서 찾아낸다. 


시험이 있다면 물리적 반복도 존재한다. 이제 예술가는 최초의 공식을 찾아낸 수학자와 같아진다. 작품이란 예술가의 개체성 위에서 고유하게 성립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작품은 무한히 반복해서 복제할 수도 있게 된다. 복제의 개체적 실현, 개체의 복제적 실현, 그것이 칼더의 모빌이다. 브로셔에 따르면, 후기에 그는 선박을 건조하듯, 볼트와 너트를 이용해서 산업용 철판을 사용해서 대형 공공 조각들을 만들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수작업으로 만든 소형 기계가 점차 거대한 기계로 바뀐 것뿐이다.


거대한 주름(Grand Crinkly, 1971) 철판, 막대, 나사, 물감 770 x 865 x 375 cm Leeum, Samsung Museum of Art ⓒ 2013 Calder Foundation, New York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리움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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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 눈에 쏙 들어와서 아직 마음에 남아 있는 작품은 아내 루이자의 마흔세 번째 생일 선물로 만든 작품이다. 아마 딸애랑 같이 전시를 구경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내에게 이런 선물을 직접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신뢰해도 좋지 않을까.


루이자의 43세 생일 선물(Louisa’s 43rd Birthday Present, 1948) 철판, 나무, 철사, 펠트, 담배상자, 물감 박스 크기 : 6.4 x 22 x 12.9 cm ⓒ 2013 Calder Foundation, New York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리움 홈페이지에서)


어디선가 흥겨운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악대는 상자에서 나와 행진하고 칼더와 루이자는 서로 부둥켜안고 은은한 촛불 아래에서 춤을 춘다. 아기가 생겨날 것 같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