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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시 / 에세이 읽기

박강 시집 『박카스 만세』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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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박강의 첫 시집 『박카스 만세』(민음사, 2013) 출판 기념회가 대학로에서 있었다. 광화문 모임에 나갔다가 문정희 선생님을 비롯해 권혁웅, 조강석, 이재훈, 주영중, 손미 등을 만났다. 역시 시를, 문학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있을 때 나는 가장 뜨거워진다. 즐겁고 기뻤다. 새벽에 술에 취한 채 작은 글을 하나 썼다. 미완이지만, 여기에 일단 옮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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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의 시는 대개 "새로 손금을 파고 싶"(「폭설」)어 하는 청년들의 불우를 재료로 삼는다. "실패" "좌절" "비명" "해직" 등 죽음을 향해 느리게 이동하는 하강의 단어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죽지 못해 삶을 사는 이들의 삶을 그저 직관할 때 그의 시들은 역설적으로 놀라운 활력과 충격을 만들어 낸다. 


크면 꼭 빤스 입은 슈퍼맨이 되야 하나요, 세상의 꼭대기에서만 날아다녀야 하나요 (「아랫목의 순례자들」)


제발 가르쳐 주세요, 적진은 어디에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손이 정말 시장을 지배합니까, 발 닳도록 커피 나르며, 책상 밑 유령 같은 손으로 토익 책을 훔쳐 보며, 세계는 넓고 할 일은 없습니까, 사막에 플랜트를 세우겠습니다, 제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뽑아만 주신다면 (「이불 속의 마적단」)


못 믿겠지만 아빠의 성적은 늘 아이 엠 에이였다가 어느 해 한 번 아이엠에프를 맞았을 뿐이란다.  (「절차탁마 발기만성」)


등의 강렬한 야유나 역설은 재바른 리듬으로 쓰여서 입속에서 굴릴수록 머릿속에서 공명하는 기이한 기쁨을 만들어 낸다. 「서툴고 길게 말하는 것은 블루스의 조건」은 영어로 억압하는 한국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청년들의 삶의 풍경을 선연하게 묘사한다. 눈으로 읽다 보면 마음에 사진이 저절로 찍히는 느낌이다.


구름의 입술이 둘둘 말린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사람들이 줄지어 몰려간다. 종로 YBM 영어 학원의 분주한 입구, 회전문의 혀가 [l]에서 [r] 각도로 바뀌며 L씨를 뱉어 낸다. 


평론가 조강석의 말처럼, 박강의 첫 시집은 "시민에서 민중으로 고양되었다가 다시 서민으로 심리적 강등을 겪은 이의 내적 구조물"일지도 모른다. 특히 2부 「역류하는 서식지」에 실린 시들이 그렇다. 서식지를 덮친 반동의 물결에 온몸을 적시면서 버팅기는 이들을 안쓰러움.


심장은 주문된 박자에 맞춰 쉼 없이 뛰어왔으나

당신 입은 좀체 화성(和聲)을 내보질 못했어요 단타, 연타, 얻어맞으며 둔탁한 신음 소리로 버텨 온 날들


이제 쓸모없이 버려져, 당신

체온은 서늘하고 맥박은 꺼져 있습니다. (「고물 드럼을 꺼내다」)


또는


우리의 연애는 가능합니까 (「스콜성」)


라고 묻는 마음의 처절함. 아, "뼈와 뼈 사이로 들려오는 검은 새의 유언"(「폐원」) 같은 사회적 삶의 시적 보고서들. 이 보고서들은 치열하면서도 처연하다. 희망을 잃지 않았으나 절망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하다. 



3

그러나 이 시집에는 또 다른 박강도 있다. 조금은 낭만적이어서 서투르고, 조금은 수줍어서 어눌한 방식으로 끌려 나온, 어쩌면 시인의 마음의 방 가장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숨겨 온 고해 같은 존재. 시민도, 민중도, 서민도 아니었던 노래꾼이었던, 아니 그 너머였던 시절의 박강. 그때도 여전히 그는 "젖은 성냥갑" 속에 있는 "불붙지 못한 기차들/ 줄지어 조는 여권들"(「떼르미니 역」) 같은 존재였지만, 가난과 실연의 불우를 에너지로 삼아서 마음의 심층을 깊고 굳건하게 만들어 갔던. 그 소년이 저 속에 없었다면 시대의 불우는 틀림없이 그를 해쳤을 것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간만에 사러 간 신발 발가락이 아프다

하나둘 점원이 가져 온 것마다

넣었다 발을 뺐다 대여섯 차례

터지기 직전의 풍선 같은 간절함

외발의 두루미처럼 갸우뚱 서서 나는

제짝 찾는 가죽의 숨소리를 가만 듣고 있다

첫 날갯짓의 두려움으로

조심스레 넣어 보는 구두의 입구

유년의 놀이터였던 작고 검은 호수와 사뭇 닮아서

찬 바람에 엎드릴 때마다

이듬해 눈보라를 생각하는 때가 많았다.

언제부턴가 자라길 거부한 소년의 발

갈라 터진 발바닥의 무늬를 닮아 간 얼음 표면에

죽은 짐승의 가죽 하나

채우지 못한 유서로 뒹굴고 있었다

앙상한 목선의 뼈들끼리 끼익 끼익

서로의 등을 긁어 주느라 말 없던 시간

깎기 싫은 발톱만 자꾸 자라나

이불에선 감추지 못하는 오줌 자리 냄새만 났다

커 간다는 건 어쩌면 신발처럼

제 냄새를 도로 제 몸속에 밀어 넣는 일이란 생각

그럴 때마다 바짝 발톱이 깎고 싶었던 걸까

헐렁해지는 한 치수 안에서

아무도 못 찾을 짐승 냄새를 기르고 싶은 거였다

그런 구두 하나가 사고 싶은 저녁이다. 


(「소년은 몰래 구두를 모으며 자란다」 전문)


그렇게 제 냄새를 가득 채운 짐승 하나가 굳건하게 자라, 속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민다. 

박카스, 만세! 그래,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