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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시 / 에세이 읽기

이원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 한겨레 게재 칼럼



지하철 옆자리의 한 여학생이 번개처럼 손을 놀린다. 손바닥의 반만한 휴대폰을 들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문자판을 번개같이 훑어가면서 어딘가로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낸다. 그 모습이 신통방통하여 한참을 쳐다보고 있자니, 고개를 홱 돌려 외면해 버린다.

 

그렇다. 그들에게도 소통이 필요하다.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와 마음을 털어놓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전자 소통 도구와 연결된 새로운 신체를 갖고 있다. 그래서인가? 스크린 위에서 쏜살같이 스쳐가는 그들의 내면은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조차 꽤 힘들다. 아니, 거부당한다.

 

그 여학생의 고개 돌리기, 완강한 부정과 몸을 섞어 소통하기 위해 젊은 시인 이원은 자신의 자아를 전자 신체로 개조하고 그들의 언어로 시를 쓴다. 소통을 위해 몸을 바꾸고 언어를 차원 이동시키는 것이 오늘날 문화 생산자들의 고민이다.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는 그 고민을 선취하여 보여준다. 좋은 시인이다. 


+ 한겨레 2002년 4월 20일자 칼럼이다. 옛 블로그에서 옮겨 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