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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르네상스시대에도… 루이 14세때도… 회계(會計)가 곧 ‘심판’이었다

2주에 한 번씩 《문화일보》에 서평을 씁니다. 이번에 다룬 책은 역사학자 제이컵 솔의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정해영 옮김, 메멘토, 2016)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회계가 역사에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지를 추적한 아주 흥미로운 책입니다. 서평에는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지만, 제 평소 관심사 때문인지, 특히 회계적 상상력이 문학과 예술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가를 이야기한 부분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단테, 보카치오, 디킨스, 라블레, 로크, 마키아벨리, 몽테뉴, 발자크, 베이컨, 생시몽, 세르반테스, 소로, 스위프트, 아우구스투스, 올컷, 워즈워스, 콘래드, 카스틸리오네, 키케로, 마크 트웨인 등 이 책에 나오는 인물만으로 따로 문학사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 책에서 회계란 단순히 경제 활동에 대한 계산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계산서를 돌려받습니다. 복식부기로 쓰인 것은 돈의 흐름을 기록한 금전출납부만이 아니라, 인생의 흐름을 기록한 비망록도 포함합니다. 매일 인생의 빚과 소득을 기록하는 장엄한 의식이 어떤 세계관에서 연유했는지를 짐작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어서 무척 좋았습니다.  

아래에 서평을 옮겨 둡니다.


제이컵 솔의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정해영 옮김, 메멘토, 2016)



르네상스시대에도… 루이 14세때도… 會計가 곧 ‘심판’이었다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 제이컵 솔 지음, 정해영 옮김 / 메멘토


서양에서 경제(economy)라는 말은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서 유래했다. 오이코노미아는 가정을 관리하는 기술, 즉 ‘살림술’을 뜻한다. 그러나 살림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은 기술에 속한다. 세월에 따라 조금씩 마모되는 재산,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물건 가격, 노동 인구의 갑작스러운 질병이나 사망 등 여러 변수는 늘 수지를 예측하기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문명의 발달에도 사람들 모두가 편리하게 이용할 만한 살림술 도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가령, 가계부는 앱의 시대에도 아직 충분히 혁신되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림술’을 이야기할 때 ‘계산’ 대신 ‘운명’이라는 수단을 이용한다. 합리적 이해의 영역 바깥에서 ‘신의 뜻대로’ 모든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 버린다.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 왔는가’에서 저자는 한 가족의, 한 회사의, 한 도시의, 한 국가의 살림살이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의 산물인 ‘회계’가 어떻게 역사의 변동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자세히 추적한다. 많은 미시사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복식부기’라는 살림술을 뼈대로 삼아 서양사 전체를 다시 축조한다. 

저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시작하여 스페인 제국, 루이 14세의 프랑스, 네덜란드 공화정, 대영제국, 초기 미국에 이르기까지, 효과적인 회계와 정치적 책임성은 사회의 흥망성쇠를 갈랐다”고 말한다. 살림 상태를 실시간으로 엄밀히 기록하고, 그 기록을 외부에서도 열람하도록 개방하며, 그 진실성에 대한 공적인 감사가 이루어지는 국가나 조직은 일어서고, 신성불가침이나 안보 또는 비밀 등을 이유로 그 숫자를 계산할 수 없도록 은폐한 국가나 조직은 결국 스러졌다는 것이다.

복식부기는 중세 이탈리아의 독창적 발명품이다. 복식부기는 오이코노미아를 불가지의 영역에서 빼내어 교육만 받으면 모두 접근 가능한 지식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리고 복식부기를 이용한 조직이 번영함에 따라, 회계는 숫자(수학)를 통해 세상에 감추어진 신의 신비를 파악하고 거기에 맞추어 살아가는 데 맞춤한 필수 지식으로, 한 국가를 신의 뜻에 따라 운영하는 핵심적인 통치술로까지 승격된다. 가정 파탄은 흔히 경제 파탄 이후에 나타나며, 재정 붕괴는 보통 국가 비극의 시발점을 이룸을 생각하면, 정확한 회계를 기본으로 삼지 않는 개인이나 조직이 파멸을 맞는 건 당연하다. 이 책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자 르네상스의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문의 흥망을 통해 이를 뚜렷이 보여준다.

캥탱 마시의 ‘징세 청부인’


초기에 메디치 가문은 복식부기를 활용한 정교한 계산을 통해 은행업에 성공함으로써 피렌체를 매수할 정도로 많은 부를 쌓았다. 이 무렵 메디치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회계 기술을 배우고, 사업 현장에서 경험을 통해 그 기술을 몸에 익혀야 했다. 그들은 복잡한 거래를 기록한 회계장부를 작성하고, 수하들이 보고한 재정 서류의 진위를 스스로 확인할 줄 알았으며, 그 결과를 책임짐으로써 외부 투자자들의 신용을 얻었다. 

그리고 그 부를 이용해 피렌체를 장악한 메디치 가문의 수장 코시모는 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후원함으로써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어찌 보면 르네상스는 돈놀이(은행)라는 어둠을 배경으로 해서 찬란하게 퍼져나간 빛과 같다. 

그러나 이들과 어울리면서 신플라톤주의의 고상함에 빠진 코시모는 자손한테 세속의 기술인 회계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 결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군주인 ‘위대한 로렌초’는 메디치 은행을 운영할 마음도, 실력도 갖추지 못했다. 은행의 회계와 결산은 거짓 보고로 인해 엉망이 되었고, 은행은 여기저기에서 투자 손실을 입고 파산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도 로렌초는 회계를 바로잡기보다 피렌체의 부유한 도시 재정을 폭력으로 약탈해서 교황 자리를 사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러다 결국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 이탈리아 북부에 이룩된 도시국가들의 공화적 번영은 사라지고 그에 따라 르네상스도 끝나버린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Reckoning’이다. 이 말은 ‘계산’과 ‘심판’을 동시에 뜻한다. 살아서 인간은 부의 흐름을 기록한 재산의 대차대조표에 따라 계산을 선고받고, 죽으면 선과 악으로 이루어진 인생의 대차대조표에 따라 신의 심판을 받는다는 세계관이 담긴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삶과 죽음의 이중장부에서 대차균형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거쳐 가는 모든 걸 기록해서 계산하는 회계적 상상력을 갖추어야 한다. 재물의 흐름을 기록하는 장부와 일상의 흐름을 기록하는 비망록은 그 두 가지 대차대조표를 대표한다.

저자는 회계를 지식의 필수 형태로 존중한 조직은 심판을 피해 번영하고, 이를 모르쇠로 일관한 조직은 심판을 받고 몰락했다고 말한다. 무적함대를 말아먹은 16세기 스페인 제국의 필리페 2세, 프랑스대혁명을 불러온 18세기 프랑스 제국의 루이 16세 등은 회계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끝내 무시하거나 탄압하면서 심판을 받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한편, 네덜란드와 영국과 미국은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기에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오늘날 고도로 복잡해진 국가 및 기업의 회계시스템을 빌미 삼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 담보대출) 사태 때처럼 온갖 부정을 저지르는 경제 사건이 빈번하다. 그런데도 당사자들은 벌을 받지 않고 ‘국가 경제에 대한 영향’을 이유로 구제금융을 받아서 하던 일을 계속한다. 계산이 심판으로 이어지지 않는 부정의가 창궐 중이다. 이 책은 심판을 통해 상황을 바로잡지 않으면 더 거대한 파탄을 불러올 수 있음을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이러한 역사를 교훈 삼지 않는다면 단 한 걸음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