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삶의 최고 기술을 엿보기 - 슈테판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을 읽다 (1)



새벽에 일어나 슈테판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안인희 옮김, 유유, 2012)을 읽었다.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라는 부제가 알려 주듯이, 츠바이크가 쓴 몽테뉴 평전이다. 저자의 갑작스러운 자살 때문에 완결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현재 남은 부분만으로도 우리에게 읽는 즐거움과 생각거리를 충분하게 제공한다. 특히, 문장의 율동감이 느껴지는 깔끔한 번역으로 인해 더욱더 독서가 즐거운 일이 되었다. ‘역자 서문, 머리말, 1장 평민에서 귀족으로’까지 80여 쪽을 읽었는데, 전체의 절반쯤 된다. ‘머리말’이 특히 아름다웠다. 

츠바이크는 ‘에세이’라는 글쓰기의 특별한 형식을 창조한 몽테뉴의 평생을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요약하고, 몽테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치의 광기’와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지나야만 했다고 서술한다. 츠바이크가 인류 문명이 “최고 높이에서 끔찍하게 추락하는 상황”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몽테뉴를 알았듯이, 우리 역시 ‘세계화’라는 약속이 끔찍한 불평등의 전개를 낳고 있는 이즈음에야 비로소 “내면을 단단히 다지는 싸움”이 모든 싸움에 선행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 중이다. 

몽테뉴 역시 그런 시대를 살았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신대륙 발견, 동서 교역의 확대 등이 가져온 거대한 희망으로 정신이 부풀어 올랐다가 내란과 종교 전쟁 등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혹한 현실 앞에서 정신 줄을 놓고 망연자실한 시대였다. 거리 곳곳에 온갖 형태로 죽음을 맞은 시체가 내걸리는, 피가 시냇물처럼 흐르고 썩어가는 냄새가 공중을 점령한 그 야만의 시대에 몽테뉴는 한 인간으로서, 인간다움을 지키면서 자유롭게 남아 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츠바이크에 따르면, 몽테뉴는 “삶의 최고 기술”을 위해 자신을 바쳤다. “자신을 지킨다는 가장 높은 기술” 말이다. 츠바이크는 말한다. “나는 그를 지상의 모든 자유인의 조상이자 수호성인이라고 여긴다.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맞서 자신을 지킨다는 이 새롭고도 영원한 학문에서 그는 가장 뛰어난 스승일 것이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자아, 자신의 ‘본질’을 혼탁하고 독성이 짙은 시대의 거품에 뒤섞이지 않도록 깨끗하게 지키기 위해 그보다 더 정직하고 격렬하게 싸운 사람은 세상에 드물고, 내적인 자아를 자기 시대에서 구하여 모든 시대를 위해 보존하는 데 성공한 사람도 드물다.”

츠바이크는 과거의 삶에서 오늘의 세계를 사는 지혜를 통찰하는 데 본래부터 탁월한 작가였다. 이 최후의 작품은, 절망 속에서 집필되었기에 더욱더 절실한 문체로 쓰였다. 다음 장이 기다려진다.


세상이야 그 혼란스럽고도 어리석은 길을 가게 내버려둔 채 [몽테뉴] 자신은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신경을 썼으니,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이성적으로 남아 있기, 비인간성의 시대에 인간적인 사람 되기, 미친 듯이 패거리 짓는 한가운데에서 자유롭게 남아 있기만을 원했던 것이다. (36쪽)


우리 시대처럼 비인간적인 시대에는 우리 안에 있는 인간적인 것을 강화해 주는 사람, 즉 우리가 가진 유일하고 잃어버릴 수 없는 깊은 내면의 자아를 그 어떤 외적인 강요를 위해서도, 시대나 국가나 정치적 강제와 임무를 위해서도 내버리지 말라고 경고해 주는 사람만큼 고마운 사람은 없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 맞서 스스로 자유를 지킨 사람만이 지상에서 자유를 더욱 늘리고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40쪽)


몽테뉴는 태어나자마자 숯쟁이 오두막에서 민중적 삶의 방식을 익히며 자랐고, 네 살 때 집안으로 불려 와서 라틴어 환경에서, 라틴어를 모국어로 익히면서 자랐다. 그에게는 자신의 성향을 자유롭게 발현하는 것 말고 어떤 억압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는 나중에 학교생활에서 지겹도록 많은 것을 암기하는 교육을 받았을 때 그가 몸서리치면서 이를 거부한 것과 대비된다. 아래의 몇몇 구절들은 교육에 대한 몽테뉴의 생각을 드러낸다.


어린 시절에 무의식적인 감각으로 자유의 쾌락과 쾌감을 익힌 사람은, 결코 다시는 그런 자유를 잊거나 잃지 않기 때문이다. (60쪽) 


위장에 고기를 가득 채운다 해도 그것을 소화할 수가 없다면 대체 무슨 소용인가? 우리 안에서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를 강하게 만들고 우리 힘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중략) 습기가 너무 많으면 식물이 시들고 기름이 너무 많으면 램프의 불이 꺼지듯이, 우리 정신의 능력도 공부할 재료가 너무 많으면 나쁜 영향을 받는다. (중략) 무언가를 암기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안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무언가를 기억 속에 지니고 있다는 뜻일 뿐이다. (몽테뉴) (62~63쪽)


우리 선생님들은 학생이 단순한 기억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가 아니라, 그가 자기 삶의 증언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63쪽)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일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거나 벽을 무너뜨리고 탈옥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신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로지 독서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몽테뉴 역시 학교라는 숨 막히는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책을 읽었다.


몽테뉴가 청춘을 위한 감옥(학교)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면, 그것은 그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중략) 은밀하게 위안을 주는 존재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교과서가 아닌 문학책이었다. [발자크 소설의] 루이 랑베르처럼 그도 자유로운 독서의 마법에 빠져서 다시는 벗어나지 못했다. (65~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