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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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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하는 신체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 ―아르노 그륀의 『복종에 반대한다』 새해 벽두에 아르노 그륀의 『복종에 반대한다』(김현정 옮김, 더숲, 2018)를 읽었다. 이 책은 한 인간이 어떻게 자기로서 살지 못하고, 권위에 굴복해 자신을 상실하고, 나아가 타자를 공격하는 데까지 이르는가를 심리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가 고민했던 ‘악의 평범성’ 문제, 즉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나치의 하수인이 되어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가 하는 문제를 잊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역사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인간, 주체로서 행동하고 약자와 공감하는 인간으로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수십 년 동안 여러 사람이 과제를 이어받으면서 끈질기게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정신의학자인 저자에 따르면, 우리 문화는 “근본적으로 복종을 권하고 있다.”..
독고준, 정우, 전혜린, 전태일, 또 다른 삶을 꿈꾸다 《문화일보》 서평. 이번에는 박숙자 선생의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푸른역사, 2017)를 다루었습니다. 『속물 교양의 탄생』(푸른역사, 2012)에 이어서 이번에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독고준, 정우, 전혜린, 전태일, 또 다른 삶을 꿈꾸다 박숙자,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푸른역사, 2017) 읽으면서 가슴이 찢겼다. 때때로 울컥하기도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고, 늙으신 어머니가 겹쳤다. 평생을 노동으로 자신을 증명했던 아버지는 ‘죽지 않은’ 태일이었고, 공장에서 ‘다행히’ 정년을 한 어머니는 상경하지 않은 영자였다. 달동네에서 자라 문학을 하고, 또 책을 만들며 살았던 나 자신은 이 책에서 다룬 준과 정우와 혜린의 정신적 파편이자 후예였다.준은 『광장』의 독고준이고, 정우는..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는 책 -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문희경 옮김, 어크로스, 2016) 일반적으로 책은 특정한 방식으로 읽도록 되어 있다. 책을 이루는 문장이 만드는 호흡은 읽기의 속도나 밑줄이나 메모의 유무 등을, 심지어 장소까지도 결정한다. 주말에 시골마을에서 읽으려고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문희경 옮김, 어크로스, 2016)을 챙겨 갔다. 올해 여섯 번째 책으로, 청탁과 관계가 없었으므로 그야말로 자유롭게 읽기 시작했다. 앞머리부터 가슴을 두드리는 문장들이 넘친다.“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 않았다. 누구나 낯선 사람과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공포와 굴복의 기록일 뿐 아니라 위험에 도전한 기록이다. 특히 호기심에 이끌려 저항한 기록이다. 호기심은 빛을 어둠으로 바꾸는 온갖 종류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선의 길이고, 문제를 미세한 분자로 분해해서..
‘속도의 편집’이란 무엇인가?(기획회의 기고) 《기획회의》 422호에 기고한 「‘속도의 편집’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입니다. ‘속도의 편집’은 단순히 “책 빨리 내!”라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이 부분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세상 변하는 속도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기획했던 이슈들은 빠르게 낡아서 독자들 관심 밖으로 사라져 버리고, 어느새 새로운 이슈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대응하려면 기획과 출간 사이의 간극을 최소화하는 빠른 속도가 얼마만큼 필요합니다. 하지만 편집과 속도가 만나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언론이나 방송과 같은 다른 미디어들이 권력이나 자본의 힘에 억눌려 언중에게 전해야 할 바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할 때, 느린 미디어이자 소수 미디어였던 출판이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1980년대에는 무크라는 형태의 잡지를 통해, 사회과..
자유를 향한 무섭고 끔찍한 갈망 _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했습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영예를 안은 한국문학의 쾌거입니다. 예전에 경향신문에 썼던 서평을 블로그로 옮겨서 기념합니다. 자유를 향한 무섭고 끔찍한 갈망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어느 날, 불쑥, 마음속으로 문장이 일어선다. 아침을 챙기려고 문득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일 수도 있다. 바쁨과 분주함 사이 올려다본 눈으로 파란 하늘이 끼어들었을 때일 수도 있다. 하루를 지내고 노란선 바깥에서 지하철을 멍하니 기다릴 때일 수도 있다. 아무튼, 무조건, 찾아온다. 삶의 의미를 신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얻지 못하고 스스로 길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현대인은 인생이 습기를 잃어 ..
201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정리 (2) _인도네시아 시인 구나완 모아맛의 연설 중 우리는 인간 평등의 필연성을 강조하려고 글을 쓴다. 우리는 삶에 대화와 토론을 제공하려고 글을 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유를 부양한다. ―구나완 모아맛(Goenawan Mohamad, 인도네시아 시인)
[문화일보 서평] 일본인이여… 몰랐다고 무책임해도 되는가 _ 가토 슈이치의 『양의 노래』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하는 국민은, 스스로 훨씬 자유롭다고 믿었을 때 훨씬 더 자유롭지 못했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존재를 몰랐던 수많은 독일 국민처럼, 군사 목표에 한정된 폭격으로 말미암아 폐허로 변해버린 베트남 마을들의 실정을 까맣게 몰랐던 미국 국민처럼.”난징대학살이 일어났을 때, 대다수 일본 국민은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그러나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 가토 슈이치는 “황군이 동양의 영원한 평화와 선린우호를 위해 어린아이와 부녀자를 포함한 중국 인민 수만 명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그 학살에 대한 무책임의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전에 아마도 분명히 학살자한테 정권을 맡긴 ‘자유의 포기’가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진실은 이처럼 가혹하다. 영혼을 횡..
가라타니 고진의 『자연과 인간』(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13)을 읽다 1내가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미국의 콜롬비아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의 영문판이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서문이 붙은 이 책을 읽고 나는 적잖은 흥분을 느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내 문학적 스승 중 한 분인 김윤식 교수의 연구를 지탱하는 이론적 기둥 하나를 보았다는 점이고(일본으로만 한정하면 고바야시 히데오에서 에토 준으로, 에토 준에서 가라타니 고진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은 김윤식의 『내가 읽고 만난 일본』(그린비, 2012)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다른 하나는 그의 논의가 날로 지지부진해져 가고 있는 한국문학 연구의 한 탈출구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오로지 이 감각에만 의존해 나는 1970년대 이후 오랫동안 끊어졌던 일본 지성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