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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가라타니 고진의 『자연과 인간』(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13)을 읽다


가라타니 고진, 『자연과 인간』(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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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미국의 콜롬비아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의 영문판이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서문이 붙은 이 책을 읽고 나는 적잖은 흥분을 느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내 문학적 스승 중 한 분인 김윤식 교수의 연구를 지탱하는 이론적 기둥 하나를 보았다는 점이고(일본으로만 한정하면 고바야시 히데오에서 에토 준으로, 에토 준에서 가라타니 고진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은 김윤식의 『내가 읽고 만난 일본』(그린비, 2012)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다른 하나는 그의 논의가 날로 지지부진해져 가고 있는 한국문학 연구의 한 탈출구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오로지 이 감각에만 의존해 나는 1970년대 이후 오랫동안 끊어졌던 일본 지성사를 본격적으로 다시 소개하고픈 열망에 불타올랐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회학자인 김성기 선배와 소세키 연구의 권위자인 윤상인 교수를 만나 일본의 현대 지성 시리즈를 기획했다. 이 시리즈에는 마루야마 마사오 이후 일본 사상사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 갔던 사상가들의 주요 작업을 우선 10종 정도 번역해 출판하려 했다. 

이 시리즈에 속한 책으로는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옮김, 민음사, 1997), 이마무라 히토시의 『근대성의 구조』(이수정 옮김, 민음사, 1999), 아사다 아키라의 『도주론』(문아영 옮김, 민음사, 1999), 마루야마 게이부자로의 『존재와 언어』(고동호 옮김, 민음사, 2002), 히로마쓰 와타루의 『근대 초극론』(김항 옮김, 민음사, 2003), 야마구치 마사오의 『문화의 두 얼굴』(김무곤 옮김, 민음사, 2003), 이즈쓰 도시히코의 『의미의 깊이』(이종철 옮김, 민음사, 2004) 등이 있다. 나로서는 야심 찬 기획이었고 이후 한일 간 관련 지적 교류가 활발해진 것을 보면 어떤 역할을 한 것 같아 내심 뿌듯하다. 다만, 첫 책의 출간 이후 내가 부서를 옮겨 버리는 바람에 진행을 더 이상 책임지지 못했고, 그 탓에 시리즈 전체의 통일성 등이 훼손되고 번역 및 계약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아서 다소 흐지부지된 점이 늘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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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아침 지하철에서 매일 들고 다니면서 읽은 책은 이번에 새로 나온 가라타니 고진의 『자연과 인간』(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13)이다. 고진의 책을 읽을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세계 공화국으로』(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7)을 뒤늦게 읽은 이후 거의 서너 해가 지난 것 같다. 

이 책은 작년에 한국에서 나온 『세계사의 구조』(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12)의 보유 형태로 쓰인 책이지만 『세계 공화국으로』 이래 고진이 보여 준 새로운 세계 구축 작업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는 데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자립적이어서 『세계사의 구조』를 먼저 읽지 않고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조금 과장해 말한다면, 500쪽에 가까운 『세계사의 구조』를 요약하는 동시에 거기에 최근 생각들을 덧붙여 써 냈기에 최근 고진 사상의 개요를 챙기기에 오히려 맞춤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오랜만에 읽은 가라타니 고진은 여전히 논리가 분명하고 통찰력이 넘쳤다. 보유 형태로 쓰였기에 전작인 『세계사의 구조』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요약, 소개된 부분이 전체 내용의 상당량을 차지하지만, 본인이 밝힌 바대로 후쿠시마 대재앙 이후의 통찰,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성찰과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 체제가 세계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평화 체제의 구축을 위한 이론적, 실천적 논리를 모색한다. 

고진에 따르면,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이념이 신자유주의는 제국주의와 논리적으로 등가이다. 120년 전 영국, 프랑스 등의 산업 자본이 후진 지역에 자본을 수출했을 때의 결과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었듯이 아메리카의 헤게모니가 약해지면서 오늘날 자본=국가 역시 아메리카, 유럽 공동체, 중국, 인도, 러시아, 아랍, 이란 등의 국가 연합으로 블록화하면서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그는 일본 헌법 9조, 즉 무력의 방기, 더 나아가서 무력의 적극적인 증여를 내세운다. 즉, 무력을 아예 포기하고 유엔과 같은 세계 공동체(세계 공화국)에 무력을 증여해 호수적 원리에 의한 평화를 달성하자는 것이다. 고진은 이것을 영원 평화 체제로 이어질 진짜 혁명이라고 부른다.(그가 말하는 교환 양식 D의 실현이다.) 칸트에 버금가는 정말 재미있는 발상이지만 제국주의를 경험했던 일본이 파시즘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런 선택에 이르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지식인의 특권인, 논리적인 수준의 이야기일 뿐인데, 묘하게 매력이 있다.

또 하나 이 책에서 그가 고민하는 것은 후쿠시마 대재앙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고대 씨족 사회 이전에 있엇던 인간과 자연 사이의 호수적 관계의 고차원적인 회복이 그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이다. 근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착취인 생산을 고민할 때 "폐기물 처리, 환경의 유지라는 코스트를 넣어서 생각"하는 호수의 경제학.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그에게 탈원전은 필수적이다. 영구할 정도로 시간이 걸리는 폐기물 처리 기간, 환경에 대한 근원적인 파괴를 유발하는 원전은 설사 현재는 경제적이라 할지라도 결국 그 코스트를 미래의 세대들에게 떠넘기는 호수적이지 못한 결정이다. 후쿠시마 대재앙은 그 사실을 눈앞에 생생하게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게다가 그 사건은 사인화(privatication)되어 있는 일본 국민들을 데모하는 인간으로, 즉 주권자로서 일으켜 세우고 있다. 의회를 통해서, 투표를 통해서 주권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집회(어셈블리)를 통해서 주권자가 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개시. 고진은 방사능은 울타리 바깥의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는, 철저하게 사인화된 일본인의 집 울타리 안쪽으로 침범해 들어오기 때문에 데모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는, 즉 데모를 하는 세상으로 바꾸는 일이 가능해졌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주권자가 되는 세상 말이다. 

이 책은 사실 단행본이라기보다는 팸플릿에 가깝다. 수많은 행렬을 통해서 사람들한테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위치를 가늠시키고 행동을 촉발하려는 목적을 품고 있다. 연설의 형태로 쓰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느낌을 받는다. 오랜만에 즐겁게 읽었다. 최근에 나온 고진의 다른 책들도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책 속에서===

 '영원 평화'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정도의 평화가 아니라 국가들의 적대 그 자체가 없는 상태, 즉 국가가 지양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15쪽)

 세계 공화국은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증여의 힘에 의해 성립합니다. 이 경우 내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전쟁 '방기'를 주창한 일본의 헌법 9조입니다. ... 그것은 단순히 교전권을 방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증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증여하는 상대는 유엔, 그리고 거기에 가입되어 있는 모든 나라입니다. (16~17쪽)

 윤리란 개인이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공동체에 내속되는 상태에서 바깥으로 나왔을 때 비로소 개인이 됩니다. 그때 처음 '자기'가 발견되고, 또 '윤리'가 문제시되는 것입니다. (25쪽)

 "진정으로 정의를 위해 싸우려고 하는 사람이 그러고도 잠깐이나마 몸을 지키려고 한다면, 사인(私人)으로서 있는 것이 필요하며 공인(公人)으로서 행동해서는 안 된다."(소크라테스) (25~26쪽)

 이오니아 폴리스의 원리는, 한마디로 말해 이소노미아(무지배)입니다. 이것은 데모크라시(다수자 지배)와 동일시되지만, 한나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이질적인 것입니다. 데모크라시에서 자유와 평등의 원리는 대립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자주 불평등을 가져오며, 그것을 평등하게 하는 것은 자유의 억제를 초래합니다. 이것은 아테네에서든 근대 민주주의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소노미아에서는 각자가 자유이기 때문에 평등합니다. (중략) 어떤 타운에 불평등이 존재하면, 옆으로 이동합니다. 이와 같은 이동성(자유)이 평등을 가져온 것입니다. (27~29쪽)

 국가 사회가 되면, 유동민 사회는 물론이고 씨족 사회에 있던 유동성도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고정된 공동체나 사회 관계의 속박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회복되는 사례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질(asyl, 피난소)'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그때까지의 사회적 구속에서 해방됩니다. (33쪽)

 탈원전으로의 투쟁은 원전을 만드는 자본=국가가 구축해 온 체제를 탈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해 그 자체가 '유토피아'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국가에 대한 저항 운동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40쪽)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어떤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국가나 자본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견해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제거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만을 보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테크놀로지, 자원, 환경이라는 문제를 국가나 자본과 무관한 것처럼 논하고, 최종적으로 인간의 욕망에 대한 비판, 근대 문명 비판으로 향합니다. 거기에는 하이데거적 존재론에서 불교 내지 노장적 인식, 또는 일본적 자연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명 비판은 매우 진지하고 근원적인 물음처럼 보이지만, 천박하고 값싸고 기만적입니다. 그것은 현대로 말하자면, 자본주의, 국가, 네이션이라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유래하는 것을 불문에 붙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그것들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46~47쪽)

 화폐를 가진 자는 상품을 가진 자보다 강합니다. 이로부터 물건에 대한 욕망보다도 물건을 항상 획득할 수 있는 '권리'를 소유하려는 욕망, 즉 화폐에 대한 욕망이 생겨납니다. 실은 여기에 일종의 도착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더 많은 화폐를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돈을 사용하지 않는 것, 즉 수전노가 되면 됩니다. (중략) 마르크스는 "수전노는 미친 자본가이고, 자본가는 합리적 수전노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본 축적에 대한 충동(drive)이 근본적으로 도착적이라는 것입니다. (48~49쪽)

 경제학은 폐기물 처리, 환경의 유지라는 코스트를 넣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56쪽)

 환경대책은 당연히 지역에 따라 다릅니다. 그것은 지역 경제나 공동체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중략) 1980년대까지의 에콜로지의 논의는 지역적인 물이나 대기의 순환계(에코 시스템) 파괴를 비판하고, 그것을 개별적으로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구 전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64~65쪽)

 온난화의 원인이 오로지 인간의 활동에 있다는 것은 일견 겸허한 태도처럼 보이지만, 역으로 인간의 능력을 과대시하는 오만한 태도입니다. 인간은 각 지역의 환경을 파괴할 능력이 있고, 그것을 멈추고 회복시킬 능력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구 전체의 환경을 바꿀 정도의 힘은 없습니다. 있다고 한다면, 원자력뿐입니다. 원자폭탄이든 원자로 사고든 그것에 의해 바로 지구를 인간이 머물 수 없는 환경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능력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세계사에서 위기적 상황을 가져온 것은 온난화가 아니라 항상 자연 원인에 의한 한랭화였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위험이 있습니다. 한랭화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농업을 중시하는 지구적 경제와 환경을 확보해야 하는데, 온난화설과 더불어 그런 시도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66~67쪽)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와는 다르게 오히려 제국주의와 닮아 있습니다. 즉 1880년대에 제국주의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본은 활로를 '자본의 수출'에서 찾았습니다. '자본의 수출'은 예를 들어 자기 나라의 노동자를 해고하고, 좀 더 임금이 싼 다른 나라로 공장을 이전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지 국가와 같은 상태를 파괴합니다. 제국주의=신자유주의는 국민국가에 의한 다양한 규제로부터 자본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71쪽)

 산업자본주의의 존속을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끊임없는 기술 혁신입니다. 왜냐하면 산업 자본의 상대적 잉여 가치는 노동 생산성의 향상을 통해서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끊임없이 값싼 노동자 = 새로운 소비자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자급자족적인 주변부, 농촌부에서 제공됩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절대적 잉여 가치입니다. (중략) 그것들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 첫 등장이 1870년대 유럽에서 생겨난 심각한 불황입니다. 이후 자본은 선진 자본주의권의 '외구'로 향했습니다. 그것이 제국주의이고, 제국주의 전쟁이 그 결과로서 일어났습니다. (74쪽)

 세계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중국이나 인도가 경제 성장을 달성한 시점에서는 더 이상 자본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본의 축적(경제 성장)이 불가능한 이상, 자본주의는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원이나 환경의 한계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산업 자본의 축적은 자신이 생산한 것을 다시 사는 프롤레타리아(노동자=소비자)에 의지합니다. 바꿔 말해 산업 자본주의는 노동력 상품이라는 '자연'에 의지합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경제에 한계를 부여하는 것은 '자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5쪽)

 자본 = 네이션 = 국가에서는 네이션이 자본과 국가가 가져오는 불평등이나 지배 관계를 완화하고 분열을 통합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헤겔은 『법철학 강의』에서 네이션을 이성적인 것으로서 최상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87쪽)

 파시즘은 반혁명이 아니라 네이션에 의한 '대항-혁명'입니다. 물론 네이션에 의해 자본주의와 국가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만들어 내는 것은 자본주의와 국가를 넘어서는 '상상의 공동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나라에서 파시즘이 강한 매력을 가졌던 것은 그것이 모든 모순을 '지금 여기서' 넘어서는 꿈(실제로는 악몽입니다!)과 같은 세계의 비전을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92쪽)

 천황 하에서만 국가 없는 사회가 가능하다고 진정으로 생각하는 아나키스트가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파시즘과 아나키즘의 친화성, 혹은 내셔널리즘과 사회주의의 유연성(類緣性)을 보여 줍니다. (93쪽)

 호수 원리는 평등을 실현하지만, 유동적 사회에 있던 자유를 부정합니다. 그것은 개인을 공동체에 단단히 결부시킵니다. 유동민 사회에서는 자유롭기 때문에 평등했습니다. 하지만 씨족 사회에서는 평등하기 때문에 자유가 희생됩니다. (118쪽)

 일반적으로 씨족 사회는 국가 형성의 전단계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정주화에서 국가 사회로의 길을 회피하는 최초의 시도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씨족 사회는 '미개 사회'가 아니라 고도의 사회 시스템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 즉 국가를 넘어서는 길을 열어 보여 주는 것입니다. (122쪽)

 교환 양식은 네 가지로 나뉩니다. A : 증여와 답례라는 호수 교환. B : 약탈과 재분배 또는 복종과 안도(安堵). C : 상품 교환. 그리고 D : A의 고차원적인 회복. (139쪽)

 사회 구성체의 역사는 세계 시스템의 역사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네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미니 시스템. 이것은 교환 양식 A(호수)에 의해 형성됩니다. 씨족 연합체가 그 예입니다. 둘째로 세계=제국. 이것은 교환 양식 B, 즉 복종과 보호라는 교환에 의해 형성됩니다. 셋째로 세계=경제. 이것은 상품 교환 양식 C에 의해 형성됩니다. 여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세계=제국이 분해되어 다수의 국민국가가 형성됩니다. 즉 사회 구성체는 자본=네이션=국가라는 형태를 취합니다. 이처럼 교환 양식 C가 지배적이 된 세계를 월러스틴은 '근대 세계 시스템'이라고 불렀습니다. 넷째로 이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스템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환 양식 D에 의해 형성되는 세계 시스템입니다. 제 생각에 칸트가 세계 공화국이라고 부른 것은 이것입니다. (141~142쪽)

 여기서 (중략) 몇 가지 편견을 정정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세계 제국이 가난했고 문화적으로도 뒤쳐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셉 니담은 중국의 과학 기술이 18세기까지 서양보다 우월했다고 말합니다. 또 『리오리엔트』의 저자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중국 경제가 18세기에는 유럽을 능가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중략) 두 번째 편견은 서유럽에는 중세에 제국이 있었는데, 그것이 근대화와 함께 여러 국가들로 분리되었다는 견해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지역에 있는 세계 제국도 마찬가지로 다수의 민족 국가(국민국가)로 분할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견해가 도출됩니다. 하지만 서유럽에서는 원래 제국이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145~146쪽)

 영속성 있는 세계 제국을 설립할 수 있는 것은 국민국가와 같은 정치 형태가 아니라 로마 공화국과 같은 본질적으로 법에 기초한 정치 형태다. (한나 아렌트) (149쪽)

 왕조의 정통성은 누가 그리고 어느 민족이 지배하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제국의 원리를 만족시키는지 아닌지 그리고 정치적인 통일에 의해 안정, 평화, 번영을 가져오는지 아닌지에 의해 판단됩니다.  정복자 왕조인 청조도 그와 같은 조건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정통성을 얻었던 것입니다. (156쪽)

 나는 역사의 반복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다루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반복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구조입니다. 아니, 반복적인 구조입니다. 놀랍게도 구조적으로 반복될 때에는 사건까지 유사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169~170쪽)

 세계자본주의의 단계는 '제국주의적 단계'와 '자유주의적 단계'의 반복으로 볼 수 있습니다.(176쪽)

 선진국의 자본은 그때까지의 시장만으로는 안 되게 되었기 때문에 바깥에서 시장을 구했습니다. 그것이 글로벌리제이션입니다. 또 자본은 그때까지의 규제나 세 부담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입니다. (181쪽)

― 청일 전쟁 무렵의 중국은 원래 대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편 전쟁 이후 군대의 근대화를 통해 일본에게 강적이었습니다. 이어서 청일 전쟁에 이른 원인 중 하나는 조선 왕조의 두 파, 즉 일본 측에 서서 개국을 하려는 파와 청조의 지원을 받아서 쇄국을 유지하려는 파의 대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 '남북 조선'의 분단은 어떤 의미에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189쪽)

 데모로 사회는 바뀐다. 왜냐하면 데모를 함으로써 '데모를 하는 사회'로 바뀌기 때문이다. (199쪽)

 집회와 데모를 구별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데모의 자유가 없는 곳에 헌법에서 말하는 '집회(어셈블리)의 자유'는 없습니다. (216쪽)

 데모는 그저 수단이 아닙니다. 나는 데모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칸트는 도덕 법칙을 "타자를 그저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서 다루어라."라는 명령에 집약시켰습니다. (중략) 우리는 데모를 그저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 보아야 합니다. 데모는 현실적으로 무언가의 '수단'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략) 하지만 데모 자체는 동시에 '목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어셈블리에 오는 것일까요. 의회 정치가 기능 부전이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어셈블리는 그저 의회를 보충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표제 민주주의와는 다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개시하는 것입니다. 루소는 대표제 의회에서 인민은 주권자가 아니라 노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민은 어셈블리에서만 주권자로서 행동할 수 있다." (중략) 사람들이 주권자인 사회는 국회의원 선거가 아니라 데모에 의해 가능합니다. (217~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