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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자유를 향한 무섭고 끔찍한 갈망 _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했습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영예를 안은 한국문학의 쾌거입니다. 예전에 경향신문에 썼던 서평을 블로그로 옮겨서 기념합니다.  




자유를 향한 무섭고 끔찍한 갈망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어느 날, 불쑥, 마음속으로 문장이 일어선다. 아침을 챙기려고 문득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일 수도 있다. 바쁨과 분주함 사이 올려다본 눈으로 파란 하늘이 끼어들었을 때일 수도 있다. 하루를 지내고 노란선 바깥에서 지하철을 멍하니 기다릴 때일 수도 있다. 아무튼, 무조건, 찾아온다. 삶의 의미를 신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얻지 못하고 스스로 길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현대인은 인생이 습기를 잃어 푸석푸석하고 떨어져 누렇게 시든 듯한 이 허무의 습격을 피하지 못한다.

한강의 문장은 간결하고 정확하다. 잔혹하고 강렬하다. 겉으로 꽃처럼 화려해 보일지라도, 실은 한 단어의 분식도 허용 안 하는, 삶에 대한 정직한 포획이 거기에 있다. 통찰 없는 시선을 헛된 수사로 꾸미는 공작 같은 문장이 아니다. 먹잇감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단숨에 목줄기를 물어뜯는 표범 같은 문장이다.

『채식주의자』 연작에서 한강은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가 세계의 폭력 속에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를 벗고 한 그루 나무로 되는 격렬한 변신을 보여주지만, 한 줌의 환상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건조한 언어를 배치한다. 낯섦의 리얼리즘. 옷 아래 갇혀 있던 살들이 해방되어 노출되고, 피부의 규칙 때문에 억압되어 있던 피들이 표면을 찢고 분출한다. 손목에서 솟아나고 눈에서 흘러내린다. 도덕을 초월하고 죽음도 거부 안 하는 자유의 성장통은 지독한 섬뜩함으로 독자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압박한다.

피의 끔찍함과 살의 부끄러움을 한강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고, 더는 앞으로 가고 싶지 않은 일상의 삶을 비상정지 시킬 때 이용한다. 물론 살(고기)은 일차적으로 세계의 지배적 폭력을 상징하지만, 그 극단성 덕분에 새로운 삶을 강제하는 문턱이 된다. 중심인물인 영혜는 꿈에 혼자 길을 잃고 추위와 공포 속에서 헤매다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매달린 헛간을 지나면서 “물컹한 날고기”를 먹는다.(이 체험은 어린 시절 언니와 함께 집으로부터 나왔을 때의 가출 경험과 이어져 있다.) 그러고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을 견디지 못해 더 이상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채식주의자가 된다. 그녀의 형부는 자해를 시도한 영혜의 손목에서 솟아난 피와 엉덩이 몽고반점 탓에 떠올린 근친상간의 영감을 실제 작품으로 만들려다 인생을 잃고 파멸해 버린다. 작품에서 정상성을 대변하는 언니 역시 자궁에서 흘러나온 피를 접한 후 착실하게 견뎌온 인생 전체가 헛되이 증발해 버리는 위기를 맞는다.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 달 뒤로 다가와 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연극으로서의 삶, 유령으로서의 인생은 우리 모두의 질병이다. 숨 막히듯 암담하고 견딜수록 울적하다. “자신을 집어삼키는 구멍 같은 고통”과 참기 힘들 정도로 “격렬한 두려움”을 동반한다. 영혜가 처음엔 브래지어를, 나중엔 옷 자체를 거부했듯, “답답해서, 가슴이 조여서 견딜 수 없다.” 게다가 일단 떠오르면 가슴속에서 내몰 수도 쫓아낼 수도 없다. 익숙하지만 낯선 삶에서 익숙하지 않은 낯선 삶으로 삶의 배치도를 다르게 가져가는 수밖에 없다.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육식을 할 까닭은 없다. 동물로 태어났다고 동물로만 살 이유는 없다. 사람은 고기를 먹지 않으며 살 수도 있고, 육체를 조절하고 변형해 스스로 식물이 될 수도 있다. 어린 시절 걸핏하면 폭력을 휘둘러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채식하는 영혜의 입에 강제로 고기를 쑤셔 넣는 가부장적 아버지가 대변하는, 우연한 규칙을 필연으로 강제하는 폭력적 통치를 거부할 수 있다. 폭력에 길든 육체를 파괴하고, 이제까지 없었던 낯선 신체를 생성함으로써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

“꽃과 잎사귀, 푸른 줄기 들로 뒤덮인 그들의 몸은 마치 더 이상 사람이 아닌 듯 낯설었다. 그들의 몸짓은 흡사 사람에게서 벗어나오려는 몸부림으로 보였다.”

사람이라는 억압적 배치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 세상의 폭력을 견디면서 부자유로 살아가는 삶을 해방하는 거식의 실천을 통해 “내장을 다 퇴화”시키고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살아가는 신체를 이룩한 영혜는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라고 선포한다. 『채식주의자』는 폭력의 세상으로부터 얻은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진 후에 이룩될 신체의 새로운 조감도를 드러냄으로써 우리 시대 억압과 해방의 경계를 다시 긋고, 자유의 높이와 깊이를 보여주었다. 지금 전 세계가 이 작품을 주목하는 것은 자유의 실행이라는 문학의 임무를 이 작품이 훌륭하게 완수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