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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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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고전]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과 싸우다 _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민음사) 한 인간의 죽음, 그중에서도 살인을 소설화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한 작가의 진정한 재능은 심지어 이 주제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느냐에 달려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살인으로 이어지는 연속적 과정의 개연성을 온전히 구축하는 일만 해도 보통 난해한 일은 아니다. 재능 없는 작가들은 서사적 가치가 없는 우발로 처리하거나, 원한과 복수라는 흔해빠진 구조에 호소하거나, 사이코패스 같은 타고난 살인마를 출현시키는 등 삼류의 수법을 통해 살인의 이유를 독자들에게 떠넘기는 지적 태만을 보인다. 물론 그러한 태만에 속아 넘어가는 독자는 사실 거의 없다. 그래서 베스트셀러 등 출판 당시의 사회적 주목 여부와 상관없이, 살인을 그려낸 작품 중에 시간의 시련을 이길 정도로 훌륭한 소설이 거의 드물지도 모른다.현실에서든 이야기..
노벨문학상, 다시 문학의 본질을 물을 때(서울신문 칼럼) 벨라루스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를 다룬 ‘체르노빌의 목소리’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탐사보도 전문기자다. 사람들이 ‘문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시나 소설이나 희곡을 알렉시예비치는 거의 쓰지 않았다. 그의 주요 작품은 모두 분류상으로는 산문(논픽션)의 영역에 속한다.알렉시예비치의 작품들은 전쟁이나 재난 같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낸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깊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쉽게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민중들의 목소리를 복원했다.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사건에 휩쓸렸던 시민 수천 명을 일일이 인터뷰한 기록을 바탕으로 그 사건의 실체를 보여 줌으로써 공식 기록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인간적 진실을 폭로했다. 스웨덴 한림원이 “시대의 ..
[문화산책] 연필을 들고 떠나는 여행 괴테의 생애는 셋으로 나누어진다. 바이마르-이탈리아-바이마르. 연암 박지원의 생애도 마찬가지다. 한양-연경-한양. 한 해 반에 걸친 이탈리아 기행은 괴테에게 “마치 익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필연성, 즉 운명의 형식으로 제시됐다. 여섯 달에 걸친 연행(燕行)은 박지원에게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충격의 연속으로 다가왔다. 사실 모든 작가는 여행을 통해 극적으로 변신한다. 바이마르 궁정에서 질식해 가던 괴테는 이탈리아 기행을 떠났다 돌아오면서 상상력에 물기가 오르고 사유에 품격이 얹히는 극적 전환을 맞이했다. 할 일 없이 세월을 죽이던 중년의 한량 박지원은 그 당시 세계의 수도인 북경의 문물을 접한 후 바닥이 하늘로 하늘이 바닥으로 뒤집히는 생각의 격변 속에서 대문장가로 거듭났다.여행은 왜 떠..
[연암집을 읽다]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초정집서(楚亭集序)에서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 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옛 글을 본받아야[法古] 한다고 한다. 그래서 옛 글을 베끼고 본뜨면서도 세상이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중략) 그렇다면 새롭게 창조해야[刱新] 옳은가. 그래서 괴이하고 거짓되며 현혹하고 편벽한 글이 있어도 세상이 이를 두려워할 줄 모르게 되었다. (중략)그러면 어찌 해야 옳은가?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글을 쓰지 말아야 하는가?아아, 옛 글을 본받아야 한다는 사람은 자취에만 구애되는 것이 병이고,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는 사람은 상도(常道)에서 벗어나는 것이 근심이다. 진실로 옛 글을 본받으면서도 [오늘에 맞추어] 변화할 줄 알고, 새롭게 창조하면서도 [옛 글처럼] 전아할 수 있다면, 요즈음 ..
[연암집을 읽다] 열매와 꽃 무릇 군자는 화려한 꽃을 싫어하니 무슨 까닭인가.꽃이 크다고 해서 반드시 그 열매를 맺지는 않으니 모란과 작약이 그렇다.모과 꽃은 목련에 미치지 못하고, 연밥은 대추나 밤과 같지 않다.박에 꽃이 달리더라도, 보잘것없고 못생겨서 다른 꽃과 함께 봄을 아름답게 하지 못하지만 박 넝쿨은 멀고 또 길게 뻗어 나간다. 박 한 덩이는 크기가 여덟 식구를 먹이는 데 충분하고, 박씨 한 묶음은 밭 백 이랑을 덮기에 충분하다. 또한 박을 타서 그릇을 만들면 곡식 몇 말을 가득 채울 만하다. 그러므로 꽃과 열매를 똑같이 여기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이란 말인가.―「이자후(李子厚)의 아들을 위한 시축(詩軸, 시 적은 두루마리)의 서문」 夫君子之惡夫華, 何也. 華大者, 未必有其實, 牡丹芍藥是也. 木瓜之花. 不及木蓮. 菡萏之實..
[연암집을 읽다] 덕에 대하여 무릇 덕에 흉하기로는 정성을 다하지 않는 것만 한 게 없다.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얻을 것도 없다. 그러므로 가을에 열매가 없는 것을 흉년이라고 한다. ―「이자후(李子厚)의 아들을 위한 시축(詩軸, 시 적은 두루마리)의 서문」夫德之凶. 莫如不誠. 不誠則無物. 故秋之不實曰凶. (李子厚賀子詩軸序) 매일 아침에 일어나 『연암집(燕巖集)』을 조금씩 읽고 있다. 여기에 읽으면서 초(抄)한 것을 모아 둔다. 연암은 대문장가이자 사상가로, 읽으면서 배우는 바가 아주 많다. 예전 스무 살 무렵에 『열하일기』를 베끼면서 문장을 연습했는데,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연암집』을 베껴 쓰니 감회가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