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과지성사

(19)
미래에 걸어 맹세하지 마라 네가 내 과거를 망쳐 버려서 미래에 씻어낼 눈물이 한없이 많아. 네가 죽인 부모의 자식들은 살아남아서 마구 보낸 청춘처럼 늙어 가며 탄식하고 네가 죽인 자식들의 부모는 살아서 메마른 고목처럼 늙어 가며 탄식해. 미래에 걸어서 맹세하지 마라. 과거를 망쳤으니 쓰기 전에 망쳤어. _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 『셰익스피어 전집』, 이상섭 옮김(문학과지성사, 2016) ===== 이렇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이상섭 선생님 번역으로 오랜만에 「리처드 3세」를 읽었다. 권력 중독의 상징인 리처드 3세는 척추 측만증의 장애를 안고 태어나 두꺼비, 거미 등의 모멸적 별명으로 불리고 더러운, 추악한, 불쾌한 등의 형용사를 평가어로 달고 살아간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채, 피 비린내 나는 장미 전쟁의 와중..
88년생 김안나 - 일의 기쁨과 슬픔 88년생 김안나. 요즈음 화제작이 된 베스트셀러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 2019)의 주인공이다. 신예 작가 장류진이 쓴 이 소설은 판교 테크노밸리에 있는 스타트업 ‘우동마켓’이 배경이다. 중고거래 전문 앱을 운영하는 이 작품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기업이 시도해 왔던 온갖 업무 혁신의 결과가 적나라하게 폭로되면서 생생한 현실감을 준다. 더없이 불행히도, “회사에서 울어본 적 있어요?”라는 ‘일의 슬픔’의 형태로.“매일, 약속된 시간에, 선 채로, 짧게” 애자일로 업무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스크럼’은 대표의 마지막 일장연설로 항상 길어진 채 끝난다. “수평한 업무 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로 시행한 ‘영어 이름 쓰기’는 “데이비드께서 요청하신” 등 은근한 존칭을 즐기는 윗사람들 탓에 어이없게 무력화된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최순덕 성령 충만기』와 새로운 이야기꾼의 탄생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21세기 고전’. 이번엔 이기호 소설집 『최순덕 성령 충만기』를 다루었습니다. 이 작가는 화법의 마술사와 같습니다. 다채로운 화법을 통해서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지만 전락을 피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모습을 그야말로 ‘재미나게’ 이야기하는 재능이 있습니다. 이문구, 황석영, 성석제의 뒤를 잇는 이야기꾼의 탄생이라고 불러도 좋겠지요.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최순덕 성령 충만기』와 새로운 이야기꾼의 탄생 한국문학에서 ‘입담’이란 한 소설가가 이룩한 어떤 신화를 상징한다. 황석영, 성석제 등의 이름 앞에 붙은 ‘구라장이’ 또는 ‘이야기꾼’이라는 칭호는 독자 대중의 심장에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유혹의 북소리이자, 문장들의 건조한 나열에 불과한 소설에 입말의 생생함을..
『삼국지』『해리 포터』…독자는 소설에 매혹됐다(중앙일보) 《중앙일보》에 민음사, 창비,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 등 주요 문학 출판사를 중심으로 열다섯 군데 출판사의 역대 베스트셀러에 대한 분석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리스트를 넘겨받아서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와 함께 분석해 보았습니다. 기사에도 나와 있지만, 아무리 문학 작품이 기본 부수를 팔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해도, 역시 슈퍼 베스트셀러는 문학이었습니다. 그다음이 이른바 문학의 한 부류로 볼 수 있는 에세이였죠. 리스트에는 빠져 있지만, 그다음은 아마도 학습서 또는 실용서일 겁니다.슈퍼 베스트셀러들이 문학으로 쏠려 있는 것은, 대중들의 관심이 집중될 만한 초기의 어떤 문턱을 넘어서고 나면, 누구나 재미와 감동과 정보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종합 양식이기 때문일 겁니다. 특정 욕구가 있는 사람들뿐만 ..
[오래된 독서공동체를 찾아서] <9> 군사독재 어둠을 깨며 함께 읽기 35년 (시흥 상록독서회) “저도 형님들한테 듣기만 했습니다. 첫 인연은 1978년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독서회가 출발한 것은 1981년부터죠. 지금은 영등포 평생학습관에서 만나지만, 그전에는 구로도서관에서 스무 해 동안 함께했고,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시흥의 헌책방 ‘씨앗글방’ 뒤쪽의 골방에서 같이 읽었습니다. 처음 이름은 씨앗독서회였습니다.”기억의 샛길을 더듬느라 정화양 씨의 목소리가 아련하다.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수줍고 쑥스럽게 입술이 세월을 탄다. 상록독서회는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의 독서공동체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다. 1970년대 말 시흥의 달동네에서 열린 한 야학에 다녔던 청년들이 모여서 시작했다. 요즘처럼 배움이 흔하지 않을 때, 야학은 집안사정 탓에 배움을 얻거나 계속하지 못한 이들이 어울려 배우던 시민 자..
[오래된 독서공동체를 찾아서] <7> 공무원들 7년째 독서모임 "시민 목소리에 더 공감하게 됐어요"(김해 행복한 책읽기) '책읽는 도시' 선포 계기로 첫 모임인사고과 혜택 없어도 자발적 참여직급 다양하지만 독서토론 땐 평등"살아갈 힘도 얻고 업무에도 도움" “이 책 표지를 볼 때마다 상당히 불편했어요. 지난달 말에 사무실에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한 남성 직원이 의자를 밀치는 등 저한테 폭력을 행사했는데도, 조직이 워낙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저에 대한 배려 없이 그까짓 일은 아무 일 아니라는 식으로 지나치려고 했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저 개인적으로, 또 우리 조직에 대해 모멸감을 엄청나게 느꼈습니다.”소리가 조금씩 잦아들더니 결국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오늘의 ‘행복한 책’은 김찬호의 『모멸감』(문학과지성사)이다. 감정은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특히 한국사회는 모멸을 서로 ..
[오래된 독서공동체를 찾아서]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를 추구합니다 (청주 강강술래) 잠든 거인은 저절로 깨어나지 않는다. 낡은 램프는 내버려두면 낡은 램프일 뿐이다. 알라딘이 낡은 옷소매로 문질러 광을 낸 후에야 거인이 풀려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었다. 책은 사람 앞에 놓인 램프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눈을 옮기지 않으면, 안에 잠든 거인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도서관은 각종 마법 램프들의 전시장이다. 000번 총류에서 900번 역사에 이르기까지 램프들이 잘 분류된 채로 소원을 들어주려고 알라딘들을 기다리는 중이다.램프에 거인을 잠들게 만든 마법사들은 어떨까. 가끔이라도 램프를 문질러 소원을 빌고는 있는 걸까. 요리사가 집에서 요리를 하는 법은 드물고, 교사가 자식 가르치는 건 어려운 일처럼 이들 역시 자신을 위한 램프 닦기를 힘겨워할까. 책의 프로페셔널, 즉 저자, 편집자, 평론가, ..
문학권력 문제에 대하여 《문화일보》와 《동아일보》에 제 이름이 실린 기사가 나왔습니다. 문학권력 문제는 그다지 다루고 싶은 주제는 아닙니다. 비평 자본과 출판 자본이 한몸으로 결합되어 상생하는 현재와 같은 구조에서는 말 한마디 보탠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창비든, 문학동네든, 문학과지성사든 좋은 작품을 발굴해 세상에 알리고, 이를 훌륭한 비평으로 떠받쳐 왔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모두 사기업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문학에 지금까지 헌신해 온 세 출판사의 선의를 결코 의심하지 않지만, 결국 이 출판사들도 이익을 내고 손해를 줄여 파산을 면해야 하고 해마다 직원들의 복리를 향상해야 하는 기업입니다. 무슨 문학 협동조합도, 사회적 기업도 아니고, 기업의 그러한 기본 기능을 무겁게 떠맡은 회사들입니다. 문학 권력 문제를 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