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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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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란 무엇인가 나는 고전을 “인간과 삶, 그리고 세상의 보편적 가치를 대가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고전은 텍스트로서의 답을 가르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읽어낼 수 있도록 다채로운 시선을 보여줄 뿐이다. 그게 진짜 공부이고, 교육이다. 삶의 강을 건너는 데에 크고 멋진 배가 능사는 아니다. 그런데도 다들 그런 배만 선망한다. 힘들고 매운 삶과 세상의 강을 건너는 나만의 배를 건조할 수 있어야 한다. 고전은 삶의 강을 건너는 나만의 배를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_ 김경집, 『고전, 어떻게 읽을까?』(학교도서관저널, 2016) 중에서
[풍월당 문학강의] 인간은 모두 블라디미르이거나 에스트라공이다 -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 씨가 오늘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하랬어요.”저녁이 되면 소년이 온다. ‘내일’이 선포되고, ‘오늘’이 또다시 지나간다. “밤을 기다리고, 고도를 기다리고…… 또 어쨌든 기다리는……” 내일이 오늘과 똑같지 않기를 갈망하지만, 밤이 지나 다음 날이 오면, 도돌이표처럼 붙박인 하루가 또 온다. 오늘이 찾아오면 내일이기를 바라지만, 그 내일이 다시 오늘과 다르지 않다. 그 무한한 반복 속에서 우리들 블라디미르와 우리들 에스트라공은 ‘고도’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고도는 오지 않고, 또다시 소년이 온다. 그렇다면 고도를 기다리는 우리의 삶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한 달에 한 번, 풍월당 아카데미에서 고전문학을 같이 읽습니다. 요즈음 같이 읽는 것은 ‘실존의 문학들’입니다. 헤밍웨이의 『노..
[풍월당 문학강의] 어떻게 이 부조리한 생을 사랑할 것인가 3 ― 사르트르의 『구토』 한 작품마다 특별히 사랑하는 구절이나 장면이 있습니다. 작품의 전체 맥락이나 주제와는 아무 상관없이,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서 잊히지 않는 장면들입니다. 『구토』의 경우에는 로캉탱이 오랜만에 온 안니의 편지를 읽은 후에 하는 짧은 회상입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던 동안, 우리의 가장 짧은 순간도, 또 가장 작은 걱정거리도 우리들에게서 떨어져 나가 우리의 뒤에 남는 것을 우리는 용서하지 않았다. 소리, 냄새, 그날의 기분, 서로 말로 표현하지 않는 생각까지도 우리는 모두 가슴속에 안고 살았으며, 모든 것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들은 그것들을 현재로서 즐기고 괴로워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추억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늘도 없고, 후퇴도 없고, 피할 곳도 없는..
‘속도의 편집’이란 무엇인가?(기획회의 기고) 《기획회의》 422호에 기고한 「‘속도의 편집’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입니다. ‘속도의 편집’은 단순히 “책 빨리 내!”라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이 부분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세상 변하는 속도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기획했던 이슈들은 빠르게 낡아서 독자들 관심 밖으로 사라져 버리고, 어느새 새로운 이슈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대응하려면 기획과 출간 사이의 간극을 최소화하는 빠른 속도가 얼마만큼 필요합니다. 하지만 편집과 속도가 만나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언론이나 방송과 같은 다른 미디어들이 권력이나 자본의 힘에 억눌려 언중에게 전해야 할 바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할 때, 느린 미디어이자 소수 미디어였던 출판이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1980년대에는 무크라는 형태의 잡지를 통해, 사회과..
[문화일보 서평] 동물원에서 인간과 역사를 성찰하다 _나디아 허의 『동물원 기행』(어크로스, 2016) 이번 주에 읽은 책은 대만의 소설가 나디아 허의 『동물원 기행』(남혜선 옮김, 어크로스, 2016)입니다. 동물원의 역사를 통해, 동물과 인간이 맺어온 관계를 탐색하는 책입니다. 동물원 마니아로서 기회 닿으면 이런 기행을 다녀서 글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러웠다는 뜻입니다. 지면 관계상 조금 줄여서 실렸기에, 아래에 《문화일보》 서평을 원본대로 옮겨 둡니다. 아름다운 문체로 쓰인 글을 읽으면 언제나 질투부터 난다. 특별히 그 문체가 풍요로운 지식과 신선한 감각과 예리한 통찰을 한꺼번에 견디려고 이룩된 것일 때에는 속에서 불이 솟는 기분이 든다. 거기다 나이까지 나보다 어리면 신진을 만난 기쁨과 헛삶에 대한 슬픔이 섞이면서 만감을 불러일으킨다. 대만의 젊은 소설가 나디아 허의 『동물원 기행』..
[시골 마을에서 논어를 읽다 9] 공야장(公冶長) _공자의 사위 이야기 5-1 공자가 공야장을 두고 이야기했다. “사위 삼을 만하다. 비록 옥에 갇힌 몸이지만, 그의 죄는 아니다.” 그러고는 자기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子謂公冶長, 可妻也, 雖在縲絏之中, 非其罪也. 以其子妻之.공자는 제자들을 평하면서 가장 먼저 사위인 공야장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고는 그가 범죄 혐의로 옥에 갇힌 사람임을 환기한다. 고대에는 연좌의 위험이 있었기에, 죄인과 인척을 맺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공야장의 어떤 점을 좋게 보았기에 공자가 딸을 시집보낼 만하다고 말했는지는 문장에서는 알 수 없다. 공야장이 실제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자가 이런 사람에게도 딸을 시집보낸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공자는 사람 보는 눈이 아주 비범했던 것이다. 공자는 세간의 눈이 아니..
[21세기 고전](2) 문학은 참혹한 현실에서 황금빛 새를 기르는 일이다 _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 《경향신문》에 한 달에 한 차례 ‘21세기 고전’을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21세기 고전’은 2000년 이후 출간된 도서 가운데 다시 곱씹어 읽을 만큼 깊이와 넓이를 지닌 책, ‘이 시대의 고전’ 반열에 오를 책을 전문가들이 분야별로 엄선, 주 1회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제가 맡은 부문은 문학 부문입니다. 김훈의 『칼의 노래』(2001)에 이어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2002)를 소개합니다. “글씨가 있는 세상은, 참 놀라운 세상이란다.”아홉 살 동구는 아직 글씨를 읽지 못한다. 속 깊고 정 넘치는 아이이지만, “언어적 성장이 교란”(도정일)되어 있다. 그런데 동구가 글씨를 못 읽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 탓이다. 못 읽어서가 아니라 너무 잘 읽어서다. 언어의 내포와 외연, 사람이 표현하고 싶..
[오래된 독서공동체를 찾아서] <9> 군사독재 어둠을 깨며 함께 읽기 35년 (시흥 상록독서회) “저도 형님들한테 듣기만 했습니다. 첫 인연은 1978년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독서회가 출발한 것은 1981년부터죠. 지금은 영등포 평생학습관에서 만나지만, 그전에는 구로도서관에서 스무 해 동안 함께했고,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시흥의 헌책방 ‘씨앗글방’ 뒤쪽의 골방에서 같이 읽었습니다. 처음 이름은 씨앗독서회였습니다.”기억의 샛길을 더듬느라 정화양 씨의 목소리가 아련하다.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수줍고 쑥스럽게 입술이 세월을 탄다. 상록독서회는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의 독서공동체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다. 1970년대 말 시흥의 달동네에서 열린 한 야학에 다녔던 청년들이 모여서 시작했다. 요즘처럼 배움이 흔하지 않을 때, 야학은 집안사정 탓에 배움을 얻거나 계속하지 못한 이들이 어울려 배우던 시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