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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21세기 고전](2) 문학은 참혹한 현실에서 황금빛 새를 기르는 일이다 _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

《경향신문》에 한 달에 한 차례 ‘21세기 고전’을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21세기 고전’은 2000년 이후 출간된 도서 가운데 다시 곱씹어 읽을 만큼 깊이와 넓이를 지닌 책, ‘이 시대의 고전’ 반열에 오를 책을 전문가들이 분야별로 엄선, 주 1회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제가 맡은 부문은 문학 부문입니다. 김훈의 『칼의 노래』(2001)에 이어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2002)를 소개합니다. 



“글씨가 있는 세상은, 참 놀라운 세상이란다.”

아홉 살 동구는 아직 글씨를 읽지 못한다. 속 깊고 정 넘치는 아이이지만, “언어적 성장이 교란”(도정일)되어 있다. 그런데 동구가 글씨를 못 읽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 탓이다. 못 읽어서가 아니라 너무 잘 읽어서다. 언어의 내포와 외연, 사람이 표현하고 싶은 것과 실제로 표현된 것 사이의 불일치를 동구는 건너뛰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 마음의 결을 읽고 거기에 공감하는 능력이 지나쳐, 그 마음이 제대로 얹히지 못한 글씨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의 잔혹한 억압 때문에 마음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할 때, 언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놀라운 소설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신경 쓰는 동구의 민감한 마음을 작가는 섬세한 지문을 통해 살려놓는다. 지문에 동원된 언어는 한국어의 가능성을 한껏 부풀려 풍부하고 아름답다. 이와 대조적으로 소설의 대사들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현실의 연속된 비참함에 넋이 빠진 사람들은 제 말을 하지 못하고 어눌함과 악다구니 사이를 왕복한다. 험악함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과시하고, 침묵을 택함으로써 불만을 표시한다. 소설의 인물들은 입술을 빼앗긴 자들처럼 언어로써 마음을 싣는 법을 전혀 알지 못한다. 작가는 지문과 대사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세계의 명암을 구조적으로 구현한다. 첫 장편인 이 소설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대중들한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정말 뛰어난 재능이다.

동구의 입술은 세 겹의 억압에 눌린 채 짓이겨 있다. 고향으로부터 뿌리 뽑힌 공포를 이기지 못한 채 생존 욕구만 남아서 제 실속 챙기고 며느리한테 패악을 부리는 일로만 존재감을 과시하는 할머니의 상습적 욕설, 가부장제 인습을 사로잡혀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고 ‘행복한 나의 집’이라는 환각을 유지하려고 모든 책임을 방기한 채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위선, “말 못하는 두부 덩어리인 것처럼 웃지도 울지도 않는 늘 하나뿐인 표정”을 지은 채 “강박적인 결벽”으로 “가구 밑과 창틀과 앞마당을 쓸고 닦아대”면서 남편과 시어머니의 폭행을 감내하는 어머니의 침묵. 그 밖에도 동구한테 글씨를 가르쳐주는 박은영 선생이나 인생 상담자인 고시생 주리 삼촌 등 긍정적 인물조차도 언어를 잃은 채 가슴속 생각을 입술로 옮기지 못해 괴로워한다. 소설 배경이 1977년에서 1981년까지 한국 현대사에서 표현의 자유가 가장 엄혹한 환경에 놓였고, 결국 시민들 피를 삼킬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음을 상기하면 의미심장한 설정이다.

“글씨”라고 적고 있지만 작품에서 실제 다루어지는 것은 독해(讀解)가 아니라 발화(發話), 즉 표현이다. 현실의 억압으로 자물쇠 걸린 성대를 가진 한 소년이 언어를 성숙시켜 자유롭게 말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과정은 조금도 순탄하지 않고 견디기 힘겨운 상실이 연이어 이어지는 극단적 비극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행복한 순간은 띄엄띄엄 오지만, 비극적 사건은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법이다. 

열 살 된 동구 앞에 말할 수 없이 참혹한 일이 연이어 벌어진다. 박은영 선생은 1980년 5월 고향인 광주로 내려간 후 흉흉한 소문과 함께 종적이 묘연하다. 돌 되기 전에 말을 배우고 두 돌 돌아오기 전에 글씨를 익혀서 제 마음껏 조잘거리면서 집안 사랑을 독차지하던 여섯 살 터울 동생은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참척의 슬픔을 참던 어머니는 시어머니의 패악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넋이 나가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며느리가 눈앞에서 집어던진 고추장 독을 뒤집어쓴 할머니는 침묵 속에서 자리보전을 한다. 풍파를 맞고 한순간에 산산조각 난 가족들 앞에서 아버지는 망연자실한 채 공허한 말만 내뱉으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점층된 비극이 누적되면서 난독증이 살아나 동구는 다시 글씨를 잃는다. 

“나는 두 팔을 높이 쳐들어 아름다운 정원을 찬미하면서 능소화 사이에서 이 정원의 가장 아름다운 눈동자, 능소화의 찬란한 영혼, 붉은 자줏빛 원피스를 나부끼며 떠나가신 박 선생님 같은 그 황금의 새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현실의 무릎이 꺾인 자리에서 문학은 비로소 일어선다. 현실의 언어가 작동하지 않을 때 문학의 언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거기에 황금빛 새를 기르고 있다. 절망이란 정성스레 돌보던 황금빛 새가 날아가 버리는 일이다. 영혼이 무너져 황폐한 자리에 문학은 언어로써 정원을 가꾸어 황금빛 새를 되불러 들인다. 사랑의 언어를 통해 화해의 실마리를 이룩한다.

“할머니, 우리 둘이 노루너미 가서 살까.”

노루너미는 할머니 고향이다. 돌아누운 할머니를 흔들어 동구는 태어나 처음 마음을 담아 말한다. 할머니한테 뿌리를 되찾아주어 일어서도록 함으로써 동구는 어머니를 되돌려 아버지와 다시 집을 이루게 한다. 어머니와 살고 싶지만 할머니를 택한 자기희생의 언어를 통해 동구는 터전이 무너진 삶의 자리에서 희망의 시간을 발명한다. 언어란 황금빛 새를 품고 있을 때에야 제대로 서는 법이다. 삶의 비극에 억눌린 언어를 살리는 법을 알려주기에,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문학의 일을 환기하는 훌륭한 상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