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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모든 사람을 위한 영화 vs 소수를 위한 영화

오늘 아침 미국의 영화 비평가 데이비드 덴비(David Denby)가 쓴 글을 읽다가 아래와 같은 부분을 마주쳤다.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곱씹어 볼 만한 부분이 많아서 여기에 번역해 둔다. 이 글을 읽으면서 모든 사람을 위한 소설을 쓰는 작가, 모든 이를 위한 시를 쓰는 시인의 재도래를 고대하는 게 다만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사소한 기술적 진전보다는 영혼을 건 위대한 도전에 몰두했던 시대가 그립다.

과거의 위대한 감독들(데이비드 그리피스, 찰리 채플린,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장 르누아르, 월터 랭, 존 포드, 호워드 호크스, 앨프리드 히치콕, 오슨 웰스, 로베르토 로셀리니, 비토리오 데 시카, 미조구치 겐지, 구로사와 아키라, 잉마르 베리만, 젊은 프랜시스 코플라, 마틴 스콜세즈, 로버트 올트먼 등)은 대부분 그들이 소수의 관객을 위해서 영화를 찍는다고 상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예술’ 영화를 찍는다고 상상하지도 않았다. 설사 그들이 영화를 찍을 때 아주 높은 수준의 예술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만약 당신이 ‘예술’이라는 말을 존 포드 앞에서 사용한다면, 호전적 성향의 그는 안대를 하지 않은 눈을 들어 당신을 쏘아볼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위한 영화를 찍는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영혼이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영화를 찍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영화를 찍었다. 

그러나 지난 25년 동안, 당신이 한 걸음 물러서서 미국 영화들을 살펴본다면, 당신은 대량으로 배양된 괴물들, 즉 강력한 디지털 작업 기술의 점증하는 승리들을 발견할 것이다.... 도덕적으로 파고들어간 “관계” 영화들, 제한된 관객을 위해 그저 그런 수준으로 만들어진 장면들을 보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 영화, 범생이 영화, 쇼핑몰 영화, 아트 하우스 영화 등등.

《뉴리퍼블릭(The New Republ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