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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난파한 세계에서 널빤지 하나씩을 붙잡고

우리는 흔히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 출항과 귀항, 정박과 운행, 폭풍과 잔잔함 등 항해의 여정에는 인생 전체가 압축적으로 형상화돼 있다.

바다는 한순간 삶을 파괴하는 무섭고 불확실한 운명을, 난파는 살면서 마주치는 끔찍한 비극들을 상징한다. 우리는 위험을 넘을 때마다 세파를 헤쳐간다고 생각하고, 쓰라린 실패와 마주치면 배가 뒤집혀 침몰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독일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난파선과 구경꾼』(새물결 펴냄)에 따르면, 호메로스, 탈레스, 루크레티우스, 몽테뉴, 파스칼, 볼테뉴, 괴테, 쇼펜하우어, 니체 등 사유의 대가들 역시 ‘삶은 항해’라는 은유에, 특히 난파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왔다.

호메로스가 오디세우스를 바다로 몰아넣어 무수한 난파 속에서 자신을 깨닫게 하듯, 수많은 사상가가 사유의 갈피에 자신 또는 타인이 겪었던 난파의 일화를 끼워 넣어 삶의 난관과 극복의 지혜를 전하려 한다. 고난엔 삶의 가장 심각한 비밀이 감춰져 있는 데다, 고통에서 배우는 바에 따라서 삶의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은유의 계보학’을 좇아서 서양 사상사 전체를 꼼꼼히 살핀 후, 저자는 난파를 대하는 태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먼저, 한 걸음 물러서 난파를 초연하게 관조하는 구경꾼이 있다.

그에게 바다는 타고난 한계를 넘어서 자기 욕심을 실현하려는 위반의 영토이고, 재난은 욕망의 절제에 실패한 오만한 인간이 자초한 일이다.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노래한다.

“폭풍우 속의 바람이 파도를 뒤집어엎을 때/ 해안에 서서 남이 난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리라.”

이 즐거움은 단단한 대지에 발 디디고 선 자신의 안전함에서 온다. 즉 욕심 부리지 않는 적절한 절제의 결실로 얻어낸 좋은 삶을 만끽하는 데에서 오는 쾌락이다.

죽음 앞에서도 평정을 절대 놓지 않았던 에피쿠로스처럼, 자신을 잃지 않는 자는 설령 물에 빠져도 난파당하지 않는다. 인생 전체를 관조하면서 더 많은 걸 바라지 않고 지금 여기를 온전히 누리는 사람은 힘겨운 고난 속에서도 평온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다음, 승선자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 계몽주의 이후 난파는 “바람이 잦아들어 세계의 교역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치러야 할 비용”이 되었다.

이제 금욕과 평정보다 항해에 나서도록 도전을 부추기는 호기심과 정념이 인간 가치의 중심에 놓인다. 파스칼은 말한다.

“우리는 이미 승선했다!”

인간 전체가 배에 올라탄 채 불안을 견디면서 출렁이는 바다를 떠도는 중이다. 이제 누군가 자기만 육지에 있다고 상상하는 건 기만에 불과하다.

니체의 말처럼, “육지는 이제 없다.” 따라서 관조도 없다.

우리는 난파할 운명의 배에 올라탄 승선자인 동시에 자신을 구조해야 하는 난파자이기도 하다. 바다 한복판에서 인간은 널빤지 하나씩 붙잡고 헤엄치는 한편, 그들을 모아서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식으로 항해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를 ‘난파와 더불어 살기’라고 부른다.

현대의 스크린 문명은 인생 항해에서 우리를 점차 구경꾼으로 만든다.

먼 나라인 우크라이나의 비극을 자기 정당화에 이용했던 무도한 자들처럼, 구경꾼의 즐거움은 자칫 타인의 불행을 ‘무대 위 연극’처럼 바라보면서, 안락한 내 삶을 기뻐하고 과시하는 이기적 쾌락으로 변하기 쉽다.

더욱이 기후 재앙이나 코로나 전염병에서 보듯, 온 세상이 난파했는데 나 홀로 안전이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난파한 세계에서 널빤지 하나씩을 붙잡고 서로 돌보면서 함께 배를 만들어 가는 승선자의 윤리는 이제 인생 항해에서 우리가 좋은 삶을 이루는 데 필수 요소가 되었다.

“안전한 곳에 위치한 구경꾼 따위를 고려할 여유는 전혀 없다. 배의 수리나 개조 모두 거친 바다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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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칼럼입니다.

살짝 수정했습니다.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난파선과 구경꾼』(새물결,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