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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견디다(耐), 한마디를 꽉 붙잡고 지나가라

최근에 홍자성의 <채근담>이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의 교감 작업을 거쳐서 새로운 번역으로 나왔다.

이 책의 제목은 ‘풀뿌리를 씹는 이야기’란 뜻이다. “사람이 풀뿌리를 씹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라는 송대 학자 왕신민의 말에서 왔다. 비참할 때 어려움을 참고 견딜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채근담>은 처세의 지름길을 열어 주고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는 영원한 베스트셀러다. 1917년 한용운 번역으로 국내에 처음 출판된 후, 지난 100년 동안 수많은 책이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 나온 안대회 번역본은 판본의 정미함에서 지금껏 나온 모든 책을 압도한다.

<채근담>에는 크게 두 가지 원본이 존재한다. 저자 홍자성이 직접 간행에 참여한 초간본(初刊本)과 청나라 때 강희제 명령으로 출판된 청간본(淸刊本)이다. 

두 책의 내용은 꽤 다르다. 청간본은 초간본 일부에, 여러 책에서 내용을 끌어다 덧붙여 사실상 다른 책으로 봐야 할 정도다. 당연히 초간본의 가치가 더 높다. 그런데 현대의 <채근담>은 한중일 대만 어디에서도 초간본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

중국의 청간본은 일찍이 인기를 잃어 사라졌고, <채근담>이 인기를 끈 것은 정작 일본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처세의 기초이자 경영의 기본’을 알려주는 책으로 대중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근대에 중국과 한국에도 그 열기가 번져 ‘동양의 탈무드’로 자리 잡았다. 

일본 판본이 화각본(和刻本)이다. 화각본은 초간본을 바탕으로 했으나, 철저한 고증을 거치지 않아 오류가 있고 무엇보다 마지막 6칙이 빠졌다. 그동안 나온 책은 대부분 화각본에서 옮겼으므로 번역본에도 오류와 누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안 교수의 <채근담>은 초간본을 바탕으로 옛 판본 수백 종을 일일이 고증하고, 교감 작업을 거쳐서 확정한 판본이다. 국내 학자 힘으로 세계 최초로 <채근담> 정본(定本)이 탄생한 것이다. 독자들은 이제야 <채근담>을 홍자성이 저술한 모습대로, 즉 전집 222칙, 후집 141칙 등 총 363칙으로 온전히 만나게 되었다. 기념비적인 일이다. 

내용에 새롭게 접근할 길도 열렸다. 안 교수 주장에 따르면, 홍자성은 그동안 알려진 것처럼 쓰촨성 출신의 은둔 처사가 아니라 안후이성 남부 휘주(徽州) 출신의 상인이다. 휘주는 명청(明淸) 시대에 걸쳐 대운하를 중심으로 중국 상계를 지배했던 휘상(徽商)들의 본거지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상성(商聖) 호설암(胡雪岩)이 휘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홍자성은 휘주 지방에서 염상(鹽商, 소금 상인)으로 번영을 누린 홍씨 가문의 일족으로 본인 역시 상인일 가망성이 크다. <채근담>에 제사를 쓴 우공겸이 장쑤성 출신이고, 스승으로 알려진 당대의 문사 왕도곤 역시 휘주 상인 집안인 점 등을 고려할 때 달리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채근담>은 상인의 책이다. 이 책은 휘상의 처세술, 경영법, 상업 윤리 등이 깊게 스며든 인생 지침서였다. 이 책의 구성이나 내용에 휘상의 세계관이 큰 영향을 끼쳤다.

<채근담> 전반부에는 주로 사업에 열중하는 이들이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말을 담고 있고, 후반부에는 사업에서 물러난 이들이 세상을 벗어나 한가롭고 맑게 살아갈 때 읽으면 좋은 말들을 수록했다. 

홍자성은 사업에 임하는 자세를 이렇게 표현한다. “천 근 쇠뇌를 다루듯 실행에 옮겨야 하니, 가볍게 시작하는 사업은 굉장한 공을 세우지 못한다.” 

단단한 준비와 깊은 생각 없이 섣불리 사업에 뛰어들었다 어려워지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사업을 시작할 때는 바위같이, 일단 사업이 진행되면 바람같이 움직이는 것이 경영의 이치다. 

신중함을 주문하는 걸 보면 아마 홍자성 역시 성급히 사업을 시작했다 위기에 처했던 일이 많았던 듯하다. 사업이 어려워질 때마다 냉혹하기만 한 세상에 상처도 많이 받은 것 같다. 

이번에 발굴돼 처음 수록된 구절에는 표변하는 인심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처지에 따라 따뜻해지거나 냉담해지는 인심의 변덕에도 나는 기뻐하거나 성내지 않고, 세상 사는 맛이 짙든 옅든 나는 환호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홍자성은 세상이 자신을 패배시키도록 놔두지 않는다. 그는 다짐한다.

“세상 물정의 정해진 틀에 나는 털끝만큼도 매몰되지 않으리.”

세상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인생 주인이 되어 자신을 굳게 지키면서 살겠다는 뜻이다.

홍자성은 처사처럼 혼탁한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보다 상인다운 진취성으로 더러운 세상에 뛰어들어 고통을 견디면서도 좋은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산을 오르려면 만나게 마련인 험한 비탈도, 눈길을 가려면 건너게 마련인 위태로운 다리도 “견딘다는 한마디를 꽉 붙잡고 지나가라.”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세상에서 가장 의미 깊은 말이 ‘견디다(耐)’이다. 인생엔 반드시 굴곡이 있어서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고난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은 모두 고난을 견디는 마음을 통해서만 기쁨의 열매를 맛볼 수 있다. 그는 말한다.

“마음이 괴로울 때 흔히 마음을 기쁘게 하는 멋을 얻는다.”

인생도, 사업도 괴로움을 참는 힘 없이 성공할 방법은 없다. 인간은 꽃길에서 쉽게 엎어진다. 오르막을 견디는 마음만이 인간을 정상으로 끌어올린다.

홍자성에 따르면, 노력과 인내를 결합한 도덕적 성공으로만 대대로 번영을 누릴 수 있다.

“도덕에서 나온 부귀와 명예는 산속에 핀 꽃과 같아 천천히 자라나 크게 번성한다.” 

반대로 순간의 업적으로 이룬 성공은 흥망이 잦고, 권력으로 이룬 성공은 금세 시들어 버린다. 그렇다고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굴어서는 곤란하다. 홍자성이 추구하는 인간상은 영리한 도덕군자에 가깝다.

“권세와 이익, 인맥과 사치를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은 깨끗하다. 하지만 가까이하면서 물들지 않는 사람은 그보다 더 깨끗하다.”

알아야 속지 않을 수 있되, 속이는 일에는 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채근담>은 명나라 말기에 유행했던 청언(淸言)이라는 문학 장르에 속한다. ‘맑은 말’이라는 뜻에서 알 수 있듯, 청언은 더러운 세태 속에서도 청정함을 지키면서 살아가려는 이들을 위한 글이다. 

산속의 처사가 아니라 시민의 세계관을 담은 청언은 처세에 필요한 실천적 지혜와 자기 수양의 고상한 기품을 균형 잡는 실존의 미학을 추구한다.

“산수 속에서 여유롭게 사는 사람은 잡념이 사그라들고 욕심이 사라져 하루를 살아도 소년 때처럼 참되다.”

이번에 발굴된 <채근담>의 마지막 구절이다. 자연에 조용히 은둔하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풍진 속에서 살되, 분주함에 치우쳐 “백 년을 황망하게 보내지” 말고 자연을 누리는 신선처럼 여유 있게 살라는 말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일과 삶의 균형이다. 

하루를 살아도 어린아이처럼 참되게 사는 삶, 이것이 <채근담>의 궁극적 지혜이고, 성공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의 인생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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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 럭스맨>에 쓰는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