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
공자가 말했다. “부모를 섬김에 부드럽게 간해야 하니, 자기의 뜻이 부모를 따르지 않음을 드러내면서도 부모를 공경하여 어기지 않고, 힘들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 子曰, 事父母幾諫, 見志不從, 又敬不違, 勞而不怨. (「이인(里仁)」)
이 구절을 읽을 때에는 극히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부모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뜻으로 읽기 쉽다. 부모-자식의 관계는 천륜(天倫)에 해당하므로, 사회생활에서 맺는 상하 관계나 친구 사이 관계인 인륜(人倫)과는 비할 수 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 중요성이 곧 부모의 뜻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뜻하지는 않는다. 『효경』에서 증자가 “부모 말씀을 좇기만 하는 것을 효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답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옛날에 천자한테 간하는 신하 일곱이 있으면 무도할지라도 그 천하를 잃지 않고, (중략) 선비한테 간하는 벗이 있으면 아름다운 이름이 몸에서 떠나지 않고, 부모한테 간하는 자식이 있으면 몸이 불의에 빠지지 않았다. 따라서 불의를 당하면 자식이 부모한테 간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신하가 임금한테 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불의를 당하면 간하는 것이니, 부모 말씀을 좇기만 하는 것이 또 어찌 효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이 구절은 부모-자식 관계는 어떠한 경우에도 끊지 못할 무거운 관계이므로 부모의 잘못을 간하거나, 또는 부모의 잘못을 처리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맞을 때 사랑의 마음[孝]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풀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니, 더 나아가 그럴 때조차도 부모를 공경함으로써 자신의 행위에서 효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해석해도 좋겠다.
두 가지 이상의 가치가 서로 충돌할 때, 이를 이성적으로만 따지면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 가치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고귀함과 저열함, 높음과 낮음의 문제인 까닭이다. 어떤 가치도 무조건 좋지도, 무조건 나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때에 따라 알맞게(時中) 행하는 것이다. 부모-자식 관계라고 다를 리 없다.
자왈(子曰), 사부모기간(事父母幾諫), 견지부종(見志不從), 우경불위(又敬不違), 노이불원(勞而不怨).
기(幾)는 ‘기미 또는 낌새’이다. 포함은 이 말을 은미함(微)으로 풀었다. 은근히 말한다는 뜻이다. 주희는 “기운을 내리누르고 즐거운 얼굴빛에 부드러운 소리로 이야기하는 것”[下氣怡色柔聲]으로, 정약용은 “은근히 풍자해 깨닫게 하는 것”으로, 배병삼은 “에둘러 지적하다”로 본다. 어느 쪽이나 조심스레 말한다는 뜻이다.
이와 다른 해석도 있다. 『예기』에 “세 번 간해도 들어주지 않으면 울면서 따른다.”라는 말이 있고, 또 “부모를 섬길 때에는 [잘못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으며, [낯빛을] 범하면서까지 간하지 않는다.”라는 말도 나온다.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에서 “부모의 뜻에 이치를 해치는 것이 있다면, 곧 온화한 기색에 기쁜 얼굴빛을 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간하되 거듭해서 아뢰어 반드시 말을 들어 따라 주기를 기약해야 한다.”라고 했다. 여기에 근거하면, 기(幾)는 ‘거듭’으로 풀어야 한다. 삼(三)이란 숫자는 정말 ‘세 번’을 뜻하는 게 아니라 ‘많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견지부종(見志不從)은 해석이 크게 나뉜다. 포함은 지(志)의 주체를 부모로 보아 이 구절을 “부모의 뜻이 자기를 따르지 않음을 보더라도”로 풀이한다. 그런데 정약용은 견(見)을 “드러내다 또는 보여 주다”로 풀이한다. 뜻의 주체를 자식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면 풀이가 “자기 뜻이 부모를 좇지 않음을 보이면서도”로 바뀐다. 배병삼은 포함을 좇아 “부모가 끝내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로 의역한다.
위(違)은 ‘어기다’이다. 리링에 따르면, 불위(不違)는 ‘절대 복종하다’의 뜻이다. 왜 그럴까?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인륜이 아니라 천륜이기 때문이다. 끊을 수 없으니까 따르는 것이다. 효(孝)란, 결국 끊을 수 없는 이 관계를 어떻게 인간답게 관리할 것인가, 그로부터 어떻게 수기(修己)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동양고전연구회에 따르면, 로(勞)는 ‘부모의 뜻을 따르는 일에서 오는 수고로움’이다. 왕인지(王引之)는 『경의술문(經義述聞)』에서 ‘근심하더라도’로, 리링은 ‘애태우다’로 새긴다.
불원(不怨)은 ‘원망하지 않다’의 뜻이다. 맹자는 “어버이 과실이 큰데도 원망하지 않는다면, 이는 더욱 소원해지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을 근거로 해서 정약용은 “원망이란 성인도 긍정한 바이며, 충신과 효자가 스스로 그 충정을 통하는 일”로 본다. 공적 차원에서는 이렇게 원망할 수 있다. 하지만 사적으로는 그럴 수 없다. 부모가 잘못해 그 피해가 나한테까지 미쳤더라도, 예를 들면 부모가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자식인 내가 빚을 갚을지라도 부모를 사적으로 원망하거나 미워하거나 절연할 수 없다. 천륜은 엄격하다.
'번역 > 논어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골마을에서 논어를 읽다 19] 유어예(游於藝) ― 논다는 것은 무엇인가 (0) | 2019.05.11 |
---|---|
[시골마을에서 논어를 읽다 17] 호학(好學) _ 배우기를 좋아하다 (1) | 2016.09.25 |
[시골마을에서 논어를 읽다 16] 내자송(內自訟) _안으로 자신과 소송하다 (0) | 2016.09.24 |
[시골마을에서 논어를 읽다 15] 노자안지(老者安之), 붕우신지(朋友信之), 소자회지(少者懷之) _노인들은 편안히 모시고, 벗들은 믿음으로 대하며, 젊은이들은 품어 주고 싶다 (1) | 2016.08.11 |
[시골마을에서 논어를 읽다 14] 교언영색주공(巧言令色足恭) _훌륭한 말솜씨와 잘 꾸민 얼굴빛과 지나친 공손함을 부끄럽게 여기다 (2) | 2016.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