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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만드는 일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기획회의》 457호 특집은 ‘#언더35, 그들을 지지한다’입니다. 최근에 주목할 만한 책을 하나 이상 펴낸 서른다섯 살 이하 젊은 작가들을 한데 모아서 특집을 꾸렸습니다. 이 글은 그들을 응원할 겸해서 쓴 ‘기획의 말’입니다. 지면 때문에 잡지에는 편집해서 실었는데, 아래에 전문을 옮겨 둡니다.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창조자는 스스로 특수한 미로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비상구를 찾아내는 사람이다. 벽을 더듬고, 거기에 머리를 부딪혀가면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창조자가 될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이다. 작가들은 멀쩡한 길에서 미로를 본다. 갑자기, 길을 잃고 헤매면서, 막다른 골목에 스스로 이른다. 되돌아갈 수조차 없다. 돌아선 곳도 어차피 막다르니까. 『심판』의 주인공 요제프 카는 사무실을 나선 후 일부러 법원과 반대쪽을 향해 갔는데도, 창 밖에서 법원을 기어이 발견하지 않았는가. 작가의 걸음은 기존의 길이나 구획을 존중하지 않는다. 딱딱하게 굳어진 것을 물렁물렁하게 만들고,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것을 함부로 횡단하면서 이어간다. 

통로를 벽으로 느끼는 예민함 없이 누구도 작가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작가의 출발점이다. 택시를 타면 가끔 ‘어느 길로 갈까요’ 하고 묻는 기사가 있다. 승객 중에 자신이 항상 다니는 길로 택시를 운행하지 않으면 시비 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근간에는 신뢰 문제가 깔려 있지만, 다니던 길로만 다니고 익숙한 대로만 사는 것은 그저 안전할 뿐이다. 힘써 익힌 습관대로 하루를 보내고 길든 몸과 마음으로 다음을 이어가는 것도 하나의 일생일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당혹도, 경이도 함께 없다. 호기심을 일으켜 샛길을 기웃대는 당연함을 넘어서 작가가 되려면 늘 다니던 길에서도 길을 잃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특수한 미로’를 헤매는 것만으로 작가가 되는 사람은 없다. ‘비상구’를 찾아내지 못하면, 미로는 그대로 지옥이 된다. 때로는 광기에, 때로는 절망에 작가의 정신은 혼란으로 빠져든다. 작가가 되려면 스스로 미로를 만든 후 거기서 비상구를 찾는 능력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미로에서는 눈이 있어도 소용없고 귀가 달려도 헛되다. 보이는 대로 가봐야 제자리로 돌아오고, 들리는 소리를 좇아봐야 길이 중첩될 뿐이다. 이 미로에서는 촉을 내밀어 벽을 더듬고 머리를 부딪혀 가면서 길을 열어야 한다. 따라서 창조의 길은 언제나 뭉개진 손끝과 깨진 머리가 흘리는 피들로 가득하다. 

달걀을 바위에 던져서 난 흠집, 그것이 작품이다. 작가는 태어나지 않는다. 지문이 닳고 머리가 터지는 변태의 고통을 반복하면서, 알에서 깬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듯, 인간은 작가로 성장한다. 모든 알이 다 올챙이로 태어나지 못하고, 모든 올챙이가 다 개구리로 자라지 못하듯, 미로에 빠진 이들 중에서 작가에 이르는 사람은 극소수다. 어떤 이들은 손가락 사용법을 익히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머리를 들이받는 법을 알지 못하며, 어떤 이들은 벽에 흠집을 이루지 못한다. 벽은 놀랍게 탄력적이다. 방심하면 순식간에 복원된다. 흠짐이 출구요 구멍임을 깨닫지 못하면, 작품은 출산되지 않는다.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떠돌던 단테는 자신이 미로에 처해 있음을 깨닫는다. 단테는 두려움에 떨면서 울부짖는다. “인생길 반 고비에, 나,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을 헤매었네.” 이때 단테의 나이가 서른다섯 살이었다. 야심찬 정치가였고 뛰어난 시인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변했다. 이 어두운 숲속에서 단테는 ‘지옥의 문’을 발견한다. 문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다. “여기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 『신곡』은 지옥에 들어서 천국을 찾는 이야기, 절망에서 희망을 이룩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단테는 지옥이라는 ‘특수한 미로’ 속에서 천국이라는 ‘비상구’를 찾아낸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혼자 갈 필요는 없다. 단테에게는 문학의 선배인 베르길리우스가 있었다. 모든 작가는 먼저 독자로 존재한다. 읽기로부터 쓰기로 나아간다. 아니, 읽기를 통해 미로를 만드는 연습을 단단히 하고, 미로 내부에서 지치지 않도록 정신을 단련한 후, 비로소 쓰기를 향한다. 단테가 지옥을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여행한 것처럼, 작가들 역시 미로 속을 걸을 때, 읽기를 증폭기 삼아서 벽을 더듬는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쓰기는 읽기의 변주이기도 하다. 작가는 읽으면서 쓰고, 쓰면서 읽는다. 읽기와 쓰기의 이러한 상호작용은 정신에 꾸준한 불꽃을 일으킨다. 우리의 청년 작가들도 과연 마찬가지다. 

특집은 서른다섯 살 이하 작가들을 다루고 있다. 주로 소설가가 많지만, 시인, 에세이스트, 인문학자, 과학자, 만화가 등이 두루 망라되어 있다. 작가들은 지난 몇 해 동안 한국출판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주목할 만한 저작들을 하나 이상씩 출간했다. 

서른다섯 살이란 무엇인가. 한국출판의 청년성을 확인하고픈 열망의 표현이다. 청년은 언젠가 장년이 되기에 분명히 이들 안에는 미래의 책이 있을 것이다. 서른다섯 살이라면 이른바 ‘IMF 세대’에 해당한다. 이들은 청소년기에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나앉는 경험을 했고, 대학 졸업 무렵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맞이하여 청년실업의 상징이 되었다. 이들의 글에는 빈번하게 이를 둘러싼 경험들이 고백된다. 

이들은 최초로 PC를 손에 들고 태어났다. PC 통신과 인터넷은 이들과 세상을 연결하는 탯줄이었다. 부모에게서 독립한 최초의 자립적 읽기를 사이버 공간에서 경험한 이들도 많다. 어린이책이 본격화된 시대에 유년기를 보냈기에 어린 시절부터 책에 익숙한 편이고, 대중문화의 산물인 장르문학에도 이전 세대보다 자연스럽다. 

흥미로운 것은 글이 두려운 사람은 없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들은 최초의 본격적인 문자 세대일지 모른다. 자연스레 이야기를 접하고, 이야기에 경이를 느끼며, 자연스레 이야기를 지어갔으며, (내밀한 어떤 지점에서는 안 그렇겠으나) 책을 출판하고 작가라는 이름을 얻은 후에도 무게를 잡지 않고 ‘쿨하게’ 글을 쓴다. 편집자로서 오랫동안 여러 세대의 작가를 만나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이러한 자의식이 흥미롭다. 어쨌든 새로운 글쓰기는 이러한 변화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목록을 한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면 제약상 어쩔 수 없었다. 몇몇 작가들은 일정 등의 이유로 함께할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천주희, 문보영, 홍승희, 송민령, 천희란, 정지돈, 정소연, 김혜정, 장은선, 임현, 최서윤, 최태섭, 김민섭, 이상우, 이민경, 안은별, 이주란, 김동식, 안녕달, 박솔뫼, 김보통 등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지속적인 분투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