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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만드는 일

편집자로 사는 것, 역시 좋은 일이네요



편집자로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이 무엇일까요. 오래전 이 일을 시작한 이래, 저자로부터 첫 원고를 받아서 읽는 일이야말로 저한테는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우편으로 도착한 봉투를 뜯어서 원고 뭉치를 꺼내거나 전자 우편에 딸린 첨부 파일을 클릭하는 순간은 감격과 기대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죠. 회사를 나온 후, 출판에 관련한 여러 일을 해 왔고 앞으로도 많은 일을 해가겠지만, 그 어떤 일도 첫 원고를 들여다보는 기쁨을 대체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텍스트 덩어리에 지나지 않기에 첫 원고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반적 얼개는 당연히 잡혀 있지만, 전체가 튼튼하도록 단단한 구조를 세우고, 구체적인 세부를 만지고, 새로 넣을 것과 굳이 뺄 것을 고민하는 일을 편집자가 어떻게 해 내느냐에 따라 ‘책’의 모습은 아주 달라집니다. 원고를 한 줄씩 읽어 가면서 그 잠재를 확인한 후, 저자의 생각에 어울리고 독자의 기대 지평에 부합하도록 책의 육체를 이리저리 떠올려 보는 일을 하면서 편집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겁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평생 해 온 일을 내려놓고 난 후 가슴속에 항상 어떤 갈망과 공허가 있었습니다. 원고의 육체를 만져 책을 이룩하는 일은 원고 자체를 마련하는 기획과 또 다른 일입니다. 출판을 연구하고 이야기하는 모든 일도 사실 편집 노동에 근거하지 않으면 금세 실질로부터 멀어집니다. 공부는 항상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현장에서 책을 만들고 파는 치열함을 체감하지 못한 경우에는 공중누각을 산책하는 꼴이 되기 쉽죠. 온갖 자료들을 읽고 설문조사를 하고 이론을 뒤적이더라도, 현장에는 항상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거대한 활력이 있습니다. 이 활력 앞에서는 출판에 대한 어떤 담론도 무색합니다. 현장경험이 없는 관료나 학자의 글에서 때때로 느껴지는 헛바퀴는 아마 이 때문이 아닐까요.

지난 두 달 동안, 저한테는 현장으로 돌아가서 첫 원고를 읽고 책을 만드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학교 후배인 대전대 김건우 교수의 원고를 받아서 『대한민국의 설계자들』(느티나무책방)을 같이 만들었습니다. 디자인은 오랫동안 일을 함께해 왔던 안지미 씨가 맡아주었고, 동생이 하는 출판사에서 실무를 해주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처음 기획한 것은 민음사 대표로 있을 때입니다. 김 교수는 《사상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 현대지성사 연구를 오랫동안 수행해 왔습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현실의 치열함 속에서 자신의 지성을 단련해 온 일단의 지식인들에 대한 꾸준한 탐구가 있었습니다. 장준하, 김준엽, 지명관, 서영훈, 천관우, 선우휘, 류달영, 김수환, 지학순, 문익환, 안병무, 강원용, 조지훈, 김수영 등이 그 목록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이들은 정치, 언론, 교육, 종교, 학술, 사상 각계에서 오늘날 한국의 기초를 실질적으로 놓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지식인 그룹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박정희로 상징되는 ‘친일을 한 극우 반공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친일을 하지 않았고, 북한 정권으로부터 자유로우며, 근대화에 투철한 신념을 보였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1920년을 전후로 해서 태어난 이들을 학계에서는 ‘학병 세대’라고 부릅니다. 일제 말기, 고등교육을 받다가 강제로 학병에 끌려갔다 왔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건국 및 이후의 발전 과정에서 이들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양심적 우익들’입니다. 이들은 친일에 대한 생래적 거부감을 품고 있었고, 분단 과정에서 북쪽이 아니라 남쪽을 선택한 사람들이며, 교육의 영향으로 조국의 근대화에 대한 투철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인 ‘학병 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은 이들을 가장 정확히 대변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김 교수와 대화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이승만, 박정희 세력이 아니라 이들이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이라는 점입니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함께 추진하고, 새로운 이념을 제출해 통일의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더욱더 이들의 존재는 빛납니다. 

이들은 때때로 박정희 세력과 협력하기도 했지만, 박정희 세력과는 그 뿌리와 생각이 달랐습니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독재를 합리화하려 했던 박정희 세력과는 달리, 이들은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산업화와 문화적 세련화를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한국의 총체적 근대화를 이룩하려고 애썼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여러 아이디어를 종합하여 박정희 세력에게 산업화의 밑그림을 제공한 것도 이들입니다. 경제계발계획은 장준하가 이미 그 그림을 마련했고, 새마을운동 같은 유산들도 크게 보면 류달영의 아이디어로부터 나왔으며, 남북 대화의 기본 틀도 알게 모르게 서영훈의 활동과 이어져 있습니다. 이 세대야말로 진정한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입니다.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성과로 내세우면서 자신의 반대자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여 가혹하게 탄압했던 극우 보수 세력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를 생각해 낸 게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따로 존재했고 온 민중이 이들과 힘을 합쳐 지금의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탄핵을 통해 박정희 세력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운 지금, 그들이 함부로 참칭해 왔던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을 옳게 해명하는 일이야말로 역사를 바로 보는 눈을 갖추는 데 가장 우선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래전에 제가 김 교수의 책을 출판하려고 하면서 마음속으로 품었던 기획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적폐를 청산하지 않고는 우리는 미래를 향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으니까요.

어쨌든 시간이 흘러서 지난 2월 중순, 저는 김건우 교수의 원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펼쳐 내는 현대 지성사의 향연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오랜 인연을 이유로 김 교수가 이 책을 저와 같이 작업하기를 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원고를 읽고 책을 만들어 가면서 제 삶의 진정한 기쁨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일을 해서 또 다른 일이 만들어지고, 그 일이 또 다른 일을 만드는 식으로 인생은 이어져 간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을 편집하다 보니, 오랫동안 잊혔던 세포가 제 안에서 다시 깨어난 기분입니다. 이 기분이 또 다른 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