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과 서평/책 읽기

물질에 취해 ‘사유 불능’에 빠진 중국



두 주에 한 번 쓰는 《문화일보》 서평. 이번 주에는 쉬즈위안의 『한 유랑자의 세계』(김태성 옮김, 이봄, 2018)를 다루었습니다. 베이징 독립서점 ‘단샹제’의 주인으로 중국 내에서는 상당한 지적 스타인 쉬즈위안의 책은 2012년 『독재의 유혹』(김영문 옮김, 글항아리)이 출판된 이래, 국내에 꾸준히 소개되었습니다. 중국, 타이완, 홍콩의 반체제 인사를 다룬 『저항자』(김택규 외 옮김, 글항아리, 2016)는 상당힌 인상 깊었던 책입니다. 

이번에 나온 『한 유랑자의 세계』는 『미성숙한 국가』(김태성 옮김, 이봄, 2017), 『나는 내 나라가 낯설다』(김태성 옮김, 이봄, 2017)와 함께 ‘국가 3부작’으로 불리는 책입니다. 인도, 부탄,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이집트, 팔레스타인, 버마 등을 돌아다닌 기록이지만 여행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여행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어판 제목은 ‘유랑’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유람에 가깝습니다. 안에서 고민할 수 없는 것을 밖에서 탐구하는 것이요, 견문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체제 비판입니다. 

아래에 조금 보충해서 옮겨 둡니다.



물질에 취해 ‘사유 불능’에 빠진 중국


 

“나는 항상 ‘다른 곳’에 살고 있다.” 

『한 유랑자의 세계』(김태성 옮김, 이봄, 2018)에서 쉬즈위안(許知遠)이 말한다. 베이징에서 가장 유명한 책방 중 하나인 단샹제(單向街)의 주인이고, 또한 중국 사회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날카로운 비판이 담긴 글로 유명한 미디어 실천가이기도 하다.

‘유랑’이라면 보통 동쪽에서 잠을 자고 서쪽에서 밥을 먹는 삶을 말한다. 공자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에 도무지 돌아갈 길이 없을 때 유랑이 가능하다. 하지만 저자가 바라는 것은 ‘떠도는 삶’이 아니다. 저자는 체제를 고민할 뿐 부정하지 않는다. 

저자의 야심은 중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즐거움과 지식”을 구해서 중국인들을 깨우는 데 있다. 그렇다면 저자의 욕망은 ‘신사유람’의 ‘유람’에 가깝다. 저자는 고향을 버리고 세상으로 흐르지(流) 않고, 항상 고향을 마음에 세운 채 세상을 헤엄쳐(游) 배운다. 

이 책에서 쉬즈위안은 중국을 거대한 ‘마비국가’로 진단한다. “두뇌와 영혼의 반신불수에 빠져 자기 생활에 대한 세계적 호기심과 탐색능력을 상실”하고, “생산하고 소비하고 오락하고 아우성”치는 “본능적 행동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현실을 “사유하지 못하고 질의하지 못하는” 마비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중국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고도의 감수성이 필요하다.

“중국은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세계는 중국이라는 거울에서 어떻게 굴절되고 있는가?” 

쉬즈위안이 붙잡고 있는 두 가지 근본 질문이다. 인도의 콜카타, 부탄의 팀푸, 러시아의 모스크바, 이집트의 카이로, 프랑스의 파리 등 중국의 바깥에서 그의 사유는 끝없이 중국 내부를 소환한다. ‘바깥의 사유’, 바깥을 이용해 중국의 실상을 바라보고, 이른바 대국굴기라는 환상이 감추고 있는 진실을 폭로하겠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유, 평등, 박애를 추구한다면서 실제로는 부자유하고 불평등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냉정과 불신이 가득한 국가를 만들어놓고 말았다.”

이것이 중국의 진짜 현실이다. 저자의 어조는 진단에서는 무척 격렬하다. 그는 끝없이 의심한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정보 사회의 진전 등으로 인해 사람들이 거대한 착각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역사는 이미 종결되고 경제에서는 자유시장이, 정치에서는 민주제가 두 축을 형성해 대대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사람들은 흔히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의 세상을 보면 이러한 인식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덩샤오핑(鄧小平) 이후의 개혁개방이 중국의 겉모습을 바꾼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물질적 변화가 가져온 경이에 흠뻑 빠져 있을 뿐, 자유와 평등의 참뜻을 생각지 않는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쟁취한 자유의 공기를 독재의 힘이 삼켜 버리는 역사의 심연에 빠져 있다.” 사람들은 자유에 따르는 막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사회질서의 혼란을 두려워하는 한편, 물질적 풍요라는 아편에 취해서 억압된 현실을 기꺼이 맹종하고, 이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사유의 무능상태”를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다.

쉬즈위안은 사유의 무능이 널리 퍼져 있는 중국의 현실을 질타한다. 사람들을 잔혹한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문화대혁명 같은 역사적 “비극이 잊히면서 자유와 민주 같은 기본가치들이 무시되거나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바깥’을 다니면서 지혜를 얻어 그 해결책을 모색하려 한다. 

저자의 관심은 ‘민주정치’의 실현이다. 다소의 혼란을 겪더라도 자유롭게 말하고 개성을 추구하는 사회의 도래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할수록, 중국에 없는 것으로 선명히 떠오르고, 또한 경제만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무도 생각지 않아 하고 싶은 것이다. 대국굴기라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사이, 중국에서는 농민공 문제가 심각해지고, 빈부문제가 첨예화되는 중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랑의 첫머리에 저자가 인도와 부탄을 배치한 것은 아주 상징적이다. 인도에는 타고르와 간디, 네루가 있다. 타고르는 영국의 식민 통치가 가져온 문명의 혜택을 누렸지만, 이익과 탐욕을 통해서만 작동하는 그 문명은 결국 타락해 거대한 공허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음을 간파해 동양정신을 구원으로 제시했다. 이로써 중국과 달리 인도는 ‘상처받은 문명’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타고르의 뒤를 이어 간디는 ‘비폭력 저항’이라는 수단으로 인도를 영국에서 독립시켰고, 네루는 민주정치 체제를 확고히 함으로써 수많은 민족과 언어로 분열된 인도인들을 서로 공존하게 만들었다. 중국과 달리 인도는 민주제의 승리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인 것이다.

부탄은 또 어떠한가. 부탄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현대화된 국가다. 1958년만 해도 부탄은 농노제에 의존하는 군주제 국가였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민주선거를 치르는 현대 국가로 변신했다. 변신의 질도 중요하다. 물질이 정신적 가치를 압도하면서 사람들이 풍요 속의 불행에 빠진 중국이나 한국과 달리 부탄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알려졌다. 경제성장에 일방적으로 매몰되지 않고, 이를 에너지 삼아 사회 전체의 균형성장을 이루는 데 총력을 기울인 왕실 때문이다. 부탄 왕실은 마침내 군주제를 스스로 폐지하고 민주선거를 실시하는 데 이르렀다. 시민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명예롭게 퇴진하는 위엄을 이룩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부탄 왕실은 “권력을 이용해 국가 발전을 추진했을 뿐만 아니라 권력으로 인한 부패를 스스로 방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저자가 중국 공산당에, 또 중국인들한테 보내는 핵심 메시지일 것이다.

『한 유랑자의 세계』는 ‘세계의 각성과 개인의 각성’을 함께 이루고 ‘문명의 전진과 전통의 보존’을 동시에 구하려는 동양적 소명으로 가득하다. 물질문명의 발달이 결국 ‘헬조선’으로 귀착해 버린 한국사회 역시 똑같은 고민을 안고 있지 않은가. 저자의 여행길을 나침반 삼아 토론을 이어가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