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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낯선 사랑, 낯선 결혼, 낯선 이별 - 서유미의 『홀딩, 턴』(위즈덤하우스)를 읽다




“무엇보다도 사랑과 결혼이 겹치는 지점이 불편했다. 영진과 잘 지낼 때도 생활 속에서는 적당한 거리감 확보가 간절했다. 연애할 때는 밀착되는 게 좋았지만 그게 매일 이어지는 건 버거웠다. 지원이 꿈꾸는 건 오래 연애하는 상태에 가까웠다.”

어제 오후, 서유미의 『홀딩, 턴』(위즈덤하우스, 2018)을 읽었다. 사랑과 이별의 과정이 아니라 내면을 더듬어 가는 섬세하고 느릿느릿한 이별 이야기다. 지원과 영진이 스윙댄스 동아리에서 만나 결혼하고 사소한 이유로 이혼에 이르는 다섯 해 동안의 삶을 그려 낸다. 둘의 이별은 불행하되 추접하지 않다. 침착하고 산뜻해서 신선하다.

두 사람의 사랑은 ‘불행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파탄하지만, ‘쿨의 윤리’를 좇아 눈에 띄는, 아무 상처도 없이 갈라선다. 스무 해 전인 1990년대에 은희경, 전경린, 공지영 등의 소설에서 ‘불행의 블랙홀’에서 허우적대다 피투성이 자아로 결혼을 탈출하는 여성들을 우리는 보았다. 하지만 서유미가 제시하는 ‘이혼의 윤리’는 다르다. 어차피 어떠한 사랑도 사소히 시작하고, 사소히 키워 가거늘, 이별이라고 반드시 원수처럼일 까닭도 없지 않은가. 상처 없이 깔끔하게 이탈하는 결혼도 있지 않을까. 여성들은 이제 결혼에 상처받지 않을 만큼 마음이 건강해진 것일까.

소설에는 어떠한 격렬함도, 어떠한 높낮이도 없다. ‘이별을 통한 사랑의 탐구’라는 저자의 말은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이 사랑은 현재형이 아니다. 둘 사이 사랑은 증발한 지 오래다. 영진의 발 냄새라는 사소한 이유로 별거에 들어간 두 사람이 담담히 이혼을 합의하는 과정에 반짝이는 사랑의 추억들을 모자이크해서 보여줄 뿐이다. 시냇물이 바위를 만나 나누어지듯 자연스레 두 사람은 갈라선다. 반추를 통해서 예민해지는 건 지원의 내면이다. 

차라리 탐구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생활이다. 추억이 반짝이고 회한이 반복되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지원과 영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너무나 미숙하다. 둘은 사랑의 이유를 모르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생활의 이유를 모르는 듯하다. 사랑이라면 몰라도 생활은 깃털처럼 가볍고 솜털처럼 가뿐할 수 없다. 둘 다 이 사실을 끝내 알지 못한다. 이것은 ‘소외’일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지금 삶이 낯설어 견디지 못하는 중이다.

사랑은 온도가 높고 밀도는 낮다. 사랑은 기체다. 그래서 사랑은 쉽게 휘발한다. 생활은 온도가 낮고 밀도는 높다. 생활은 고체다. 그래서 생활은 쉽게 응고된다. 결혼이란 사랑을 생활로 바꾸는 것이자, 생활로만 굳어지지 않도록 끝없이 기름을 치는 일과 같다. 서로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꼴사나운 애정 표현도, 작은 계기를 빌미 삼아 말다툼하고 각방을 쓰는 싸움도 그래서 일어난다. “오래 연애하는 것 같은” 생활은 환상에 불과하다. 완전히 굳어서 숨 막히지 않도록 쟁투를 거듭하면서 ‘함께의 시공간’을 한없이 반죽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모든 관계는 습관이다.

최종적으로 만나 이혼에 합의하면서 두 사람은 ‘생활의 실체’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하지만 이별의 관성을 되돌리기에는 늦은 듯하다. “사랑하면 상대에게 좀 져주고 희생해야 하는데 그걸 못했다는 게…… 앞으로도 잘할 자신이 없다는 게 좀 두려워.” 부사 ‘좀’이 두 번이나 들어간 이 문장은 관심을 바라는 어린아이 칭얼거림 같다. 지원의 이 말에 둘은 잠시 공명하는 듯하지만, 이 어정쩡한 이별이 “사랑의 소강”인지 “사랑의 소멸”인지를 결국 확인하지 않는다. 사랑도 낯설고 결혼도 낯설고 이별도 낯설다. 한 움큼의 친밀성도 이루지 못한 가혹한 소외…….

“춤이 끝난 뒤 두 사람은 손을 놓고 말없이 인사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쑥스러워 돌아보지 못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하지만 인생은 춤이 아니지 않은가. 쑥스러움을 이기고 고개를 돌려서 얼굴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이 삶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홀딩, 턴』의 산뜻한 결별은 후련하다기보다 어쩐지 악몽을 꾼 것 같은 기분을 남긴다. 턴 다음에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아이러니하게도 냉정한 리얼리스트로서 서유미는 ‘쿨한 사랑’의 종말을 탐구해 버렸다. 산뜻한 일상들이 영영 이어지는 무덤덤한 지옥 말이다. ‘자신의 삶을 낯설어하는 사랑의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가주어 고맙다. 마음에서 모래가 서걱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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