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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책 읽는 대통령


책 읽는 대통령


2017년 현재 합계출산율 1.23명,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 과도한 양육비와 사교육비, 끔찍한 유치원 전쟁, 결혼·출산 후 여성 경력 단절… 아이 낳기 힘든 나라. 그래서 책이 있다. 

2016년 OECD 주요국 어린이·청소년 주관적 행복지수 최하위. 자살충동을 느껴본 적이 있다는 대답이 어린이·청소년 5명 중 1명. 아이가 행복하기 어려운 나라. 그래서 책이 있다. 

2015년 청년층(25~34세) 고등교육 이수율 세계 1위 69%. 2016년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 지출 25만6000원. 학력 없이 잘살기 곤란해 일단 대학부터 가지만, 돈 없이는 공부도 잘할 수 없는 나라. 그래서 책이 있다.

2016년 청년층(15~29세) 실업률 9.8%, 2년 연속 사상 최고 경신. 1인당 월평균 임금 총액 정규직 362만3000원, 비정규직 146만9000원. 비정규직 일자리만 늘어나 잘 배우고도 일하기 힘든데, 두 직종 임금 격차가 해마다 최고 기록을 경신하는 나라. 그래서 책이 있다.

2015년 취업자 1인당 연간 평균 노동시간 2113시간, OECD 34개 국가 중 33위. 구매력 평가 기준 연간 평균 실질임금 3만3110달러로 22위. 독일보다 한 해에 4.2개월을 더 일하고도 시간당 실질임금은 절반 수준을 받는 나라. 그래서 책이 있다.

2015년 세계경제포럼 발표 성별격차지수 0.649, 144개 국가 중 116위. 유사 업무의 남녀 임금 격차는 0.524로 125위. 여자로 태어나면 아주아주 서러운 나라. 그래서 책이 있다.

2014년 노동자 10만명당 산재 사망자 10.8명, OECD 국가 중 최하위. 일하려다 다치기 쉬운 안전하지 않은 직장에서 일하는 나라. 그래서 책이 있다.

2016년 추산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보장 지출 비중 10.4%, OECD 29개 국가 중 29위. 약자가 보호받을 수 없는 나라. GDP 대비 근로 무능력 지출 비중 0.6%, OECD 33개국 중 31위. 일하다 다치면 큰일 나는 나라. 그래서 책이 있다. 

2014년 가계부채 상환 비율 21.5%, 주요 OECD 국가들의 2배 이상. 가족과 같이 살아갈 집 마련에 등골을 빼줘야 하는 나라. 그래서 책이 있다. 

2016년 인구 10만명당 자살률 28.7명, OECD 국가 중 최하위.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화한 2003년 이후 부동의 지표로 타고난 목숨만큼 살기도 어려운 나라. 그래서 책이 있다.

2015년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 48.6%, OECD 국가 중 최하위. 상승 속도도 가장 빠르다. 그나마 2011년 이후에는 어르신들 분노가 무서워 조사 자체도 못하는 나라. 그래서 책이 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평생이다. 구원은 책에서 온다. 책 속에 길이 있다. 이번만큼은 책 읽는 대통령이 보고 싶다. 대통령 취임식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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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칼럼 두 번째. 어떤 간절함을 담아야 했기에, 일부러 아주 건조하게 써 보았습니다. 

지금 청와대 비서진 얼굴 타령이나 할 때가 아닙니다. 대통령 일거수일투족에 사이다 어쩌고 할 때도 아니죠. 물론 즐겁긴 합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외모중독’을 실어 나르는 ‘미시 권력’이 되어 향락을 즐기는 사이, 호칭 문제 같은 일에 집착해 소셜미디어 회사를 위한 뉴스 생산 노동을 반복하는 사이, 그러한 종류의 뉴스로 시시콜콜하게 시간을 소비하는 사이, 우리는 서서히 집중된 관심이 필요한 현실을 망각해 갑니다.

소셜미디어는 우리가 사소한 관심에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정작 중요하고 골치 아프고 해답에 시간이 걸리며 지혜를 요청하는 일을 외면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대통령은 왜 필요했을까요. 우리가 왜 촛불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 촛불이 해결해야 할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할 때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느 자리에서 출발하고 있는지를 되짚어 보아야 할 때입니다. 아주 건조하게 사실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권력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께 비서관이나 공무원이 작성하는 정책 자료가 아니라, 관련한 책부터 챙겨서 읽으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새로운 정부를 무책임 속으로 몰아넣기 쉬운 얄팍한 해답이 아니라 깊은 토론이 담겨 있는 온갖 책들을 틈날 때마다 읽어 보라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전임들한테는 이런 기대조차 할 수 없었지만, 이번 대통령한테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출판인들의 염원대로, 저는 “책 읽는 대통령”이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