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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돌이 눈뜨는 시간을 찾아서 _ 문학은 죽음을 견디는 것이다

《중앙선데이》 칼럼, 이번에는 설악산에 가족 여행을 했을 때 느꼈던 바를 하이데거, 엘리엇, 릴케의 시를 읽으면서 곱씹어 보았습니다.  




속초는 ‘신이 깃든’ 땅이다. 설악이 있고, 동해가 있다. 머무르는 것과 움직이는 것이 동시에 이 도시에서는 ‘영원성’을 얻는다. 아내와 나, 딸과 아들, 네 식구가 틈을 얻어, 산의 울림을 품었다 바다의 소리를 들었다. 스무 살, 홀로 또는 친구와 온 곳을, 서른 해 건너, 같은 나이 아이들과 함께, 아내의 손을 쥐고 걷는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숲은 고요히 쉰다./ 계곡물은 쏟아진다./ 절벽은 영구하다./ 비는 똑똑 듣는다.// 밭은 기다린다./ 샘물은 솟는다./ 바람은 거주한다./ 축복은 곰곰 생각한다.[각주:1]


여기에 여덟 줄로 응축된 만물이 있다. 숲은 고요하고 물은 움직인다. 정(靜)과 동(動). 암벽은 가만하고 비는 흐른다. 지속과 변화. 밭은 기다려 물을 얻고 샘은 솟아 대지와 섞인다. 조화와 호응. 바람은 방황을 멈추고 사람은 축복을 생각한다. 정지와 사색.

변하는 몸이 변하지 않는 곳에 와서 생각하는 새벽을 얻는다. 무상(無常). 애타는 허무가 마음에 둥지를 틀려 한다. 맑은 웃음을 타고 튀밥처럼 공중에 터지던 청춘을 본 기시감이 감정을 부추긴다. 

일찍이 삶의 ‘절대적’ 무화를 설파한 사람은 붓다였다. 모든 것은 변한다. 고정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 마음은 허무가 아니다. 허무를 느끼기 전의 나도, 허무를 느끼는 나도, 결국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도무지 빠져나갈 길 없는 ‘완전한 무’의 사자후. 

정신이 화들짝 깬다. 각성한 마음이 몸을 이끌어 세상으로 산책을 간다. 붓다가 이어서 말한다. “모든 것은 고(苦)야.” 

고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다. 몸이나 마음이 아프다는 뜻이 아니다. 발달된 의학으로든, 세속의 물질로든, 간절한 기도로든, 이 고통은 도저히 치유할 수 없다. 구원은 그렇게 간단히 오지 않는다. 

붓다가 말하는 고통은 ‘불완전하다’는 뜻이다. ‘채워지지 않는다’는 말이다.[각주:2] 자신의 불완전함을 극복하지 않는 한, 깨달음을 얻어 진정한 기쁨(니르바나)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하는 한, 삼천 배 아니라 삼만 배를 올려도 소용없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인간은 형편없지만 인류는 위대하다. 진화의 기나긴 도정을 통해 인류는 이미 무(죽음)와 싸우는 ‘저항의 형식’을 발명했다. 바로 예술이다. 이야기다. 문학이다. 

예술은 “죽음과 싸우는 유일한 것”(들뢰즈)이다. 예술은 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순간을 응고한다. 이야기는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흩어지는 경험을 엮어서 한 줄로 꿴다. 붓다보다 더 이른 시기에 호메로스는 이미 인생이 고통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신들은 비참한 인간들의 운명을 정해 놓으셨소. 괴로워하면서 살아가도록 말이오.(『일리아스』 24권 525~526행)[각주:3]


우리 인생의 운명적 형식은 유한성이다. 인간은 어머니 자궁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서만 달려간다. 삶이 괴로운 것은 인생이 단 한 번이라는 불가역성으로부터 온다. 신과 같이 불멸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더 나은 삶의 형식을 분명히 마련할 수 있다. 이것은 일장춘몽, 꿈꾸어 봐야 헛될 뿐이다. 『황무지』에서 엘리엇은 읊는다.


“살아 있는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 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 간다./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각주:4]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죽거나 죽어 간다. 이 사실은 엄연하다. 하지만 시인은 슬쩍 덧붙여 권한다. ‘견뎌라!’

그렇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약간씩 견디어 내는 일’이다. 죽음은 필연이지만, ‘어차피 죽는다’는 아니다. ‘어쨌든 살아 있으라’다. 죽음에 맞서서 무상을 견디고 고통을 어루만지는 ‘어쨌든’! 죽음의 알을 품은 채로도 ‘지금 이 순간’이 무상해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버티어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이고 또 문학일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이 며칠 지나지 않은 덕분에 늘어선 연등이 곳곳에서 아름답다. 지혜의 꽃이 저렇게 많은데, 세상에 지혜는 이렇게 드물다. 무상을 모르는 사람은,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마음에 열반의 꽃을 피울 수 없다. 붓다는 갈(喝)한다. 우주의 모든 것은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 이 운명에, 이 수레바퀴에 헛되이 집착하지 말라. 

문학을 누구나 읽을 필요는 없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집착하는 사람은 문학을 즐길 수 없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자신의 죽음을 기억했더라도 ‘어차피’가 아니라 ‘어쨌든’을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문학을 즐길 수 없다. 현재의 나를 넘어서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은 문학을 즐길 수 없다. 그런 이들은 문학의 언어를 알아듣기 어렵다. 릴케는 말한다.


그리고 너는 기다리고 있다./ 너의 삶을 늘려 주는 한 가지 것을./ 강력한 것을, 예사롭지 않은 것을,/ 돌이 눈뜨는 것을,/ 너를 향한 깊숙한 것을.[각주:5]


또 다른 삶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만이 내면의 어둠 속에서 문학의 목소리를 듣는다. 문학은 삶을 확장하는 “강력하고, 예사롭지 않은” 체험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다. “돌”처럼 경화된 마음 “깊숙한” 곳으로 언어를 침투시켜 지혜가 눈뜨는 경험을 제공한다. 문학을 읽는 것은 내면의 돌이 깨어지는 고통을 준다. 그리고 그 고통과 함께 우리 인생으로부터 또 다른 삶의 이야기가 생겨나도록 만든다. 

더 이상 이대로 살 수 없어서, 우리 안에 또 다른 삶을 불러들이기 위해서, 문학을 읽는 것이다. 나 안에서 다른 존재의 출현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새롭게 정초하는 일이기도 하다. 



  1. 하이데거, 「숲은 고요히 쉰다」, 한병철, 『시간의 향기』(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3), 113쪽. [본문으로]
  2. 사사키 아타루, 「어떻게 죽을 것인가」, 『제자리걸음을 멈추고』(김소운 옮김, 여문책, 2017) 참고. [본문으로]
  3. 호메로스, 『일리아스』(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제2판, 2016), 702쪽. [본문으로]
  4. T. S. 엘리엇, 「천둥이 한 말」, 『황무지』(황동규 옮김, 제3판, 민음사, 2017), 93쪽. [본문으로]
  5.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추억」, 『릴케 시집』(송영택 옮김, 문예출판사, 2014), 204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