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과 서평/책 읽기

선생님 나쓰메 소세키 ― 데라다 도라히코의 『도토리』를 읽고

선생님 나쓰메 소세키

―데라다 도라히코의 『도토리』를 읽고 



오랜만에 말 그대로 수필집을 후루루 읽었다. 데라다 도리히코의 『도토리』(강정원 옮김, 민음사, 2017)이다. 진주에 문학 강연을 다녀온 후, 피곤해서인지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아서, 문득, 화장실에 놓아두었던 것을 들어서 훑어 읽다가 잠들었는데, 새벽에 읽어나 마저 읽었다. 

솔직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느낌,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자유롭게 문장들이 사물로, 사건으로 옮겨 다니는 그야말로 수필(隨筆)의 전형이라는 느낌이었다. 저자는 물리학자로 일본 근대수필의 한 봉우리. 자연과 인생의 접점을 응시하는 시선이 웅숭깊다. 가령, 초신성 폭발을 본 후에 쓴 「신성」의 한 구절은 물리학자다운 매력이 넘쳐났다.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말은 단지 영원한 시간의 도정 가운데 고립된 한 점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리 떨어져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다. 먼 옛날부터 가까운 과거까지의 모든 사건에 저마다의 계수를 곱해 적분한 총화가 눈앞에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닌가.(88쪽)


현재는 과거의 적분이라는 생각. 하지만 절대로 지금 이 순간의 신비를 잃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건을 파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계수’는 더욱더 모를 것이므로. 하지만 현재가 과거의 적분이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현재엔 수많은 과거들이 감추어져 있으므로, 그리고 머나먼 우주로부터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지금 이 순간에 현전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지진일기」도 눈길을 끈다. 관동대지진을 겪은 사적인 경험을 기록한 일기 형식의 글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마음에 걸렸다.


집에 돌아오니 화재에서 몸만 피한 아사쿠사의 친척 열세 명이 피난 와 있었다. 모두가 무엇 하나 가져올 겨를도 없어서 어젯밤에는 우에노 공원에서 노숙을 했는데, 순경이 와서 ○○명의 방화꾼이 배회하고 있으니 주의하라고 했단다. 우물에 독을 넣었다느니 폭탄을 던졌다느니 별의별 뜬소문이 다 들려왔다. 이런 변두리 동네까지도 휩쓸어 버리려면 도대체 몇천 킬로그램의 독약, 몇만 킬로그램의 폭탄이 필요할 것인가. 이런 어림짐작만으로도 나는 그 이야기가 믿기지 않았다.(139쪽) 


아마 이것이 정상적 감각일 것이다. 그러나 뜬소문에 휘말려서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재난 상황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던가. 그 참혹을 생각하니 가슴이 숙연해진다.

「수필의 어려움」이라는 글도 편집자로서 흥미를 끈다. 책을 낸 후에 독자들로부터 받은 각종 항의 편지에 대한 글인데, 읽는 내내 비슷한 경험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가령, 다음과 같은 부분은 무척 재미있다. 물리학자인 데라다 도리히코의 실책을 준엄하게 지적하는 독자의 글이다. 


(속도가 큰 게 아니라) ‘속도가 빠른 운운’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는 비전문가라면 모르겠으나 물리학자로서 해서는 안 될 과오라 생각하여, 다음 판에는 반드시 수정해 주십사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무심코 관용어를 써서 무안해진 저자의 대답은 이러하다. 


그 말대로 물리학에서는 속도의 대소(大小)라고 하는 것이 정당하며, 지속을 말하는 것이라면 운동의 지속이라고 해야 온당할 것이다. (중략) 이때의 ‘속도’는 일상어의 ‘빠르기’와 동의어이며 학술어의 벨로시티(velocity)와는 같지 않다. 이를테면 ‘느린 주기’와 같은 말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주 쓰지만 ‘긴 주기’라고 바르게 쓰는 것보다 전자가 더 실감이 나므로 일상 회화에서는 자연히 그런 용례가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중략) 따라서 ‘속도가 빠른’도 실감을 강조하기 위한 일상어로서 ‘속도가 큰, 즉 운동이 빠른’의 줄임말로 통용을 허락해도 그것 때문에 물리학에 피해가 갈까 봐 염려할 필요는 없다.(236~237쪽)


요약하면 논문도 아니고 수필인데, 다소 억울하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물리학자라도 얼마든지 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으면 하는 호소도 덧붙인다. 저자들이라면 한 번쯤 겪어 봤음직한 일화들이다.

하지만 내 관심은 당연히 나쓰메 소세키다. 「나쓰메 소세키 선생님을 추억하다」라는 글에 ‘선생님 나쓰메 소세키’가 있다. 저자는 소세키가 잠시 고등학교 교사였을 시절에 만났던 제자로, 인연이 끊어지지 않고 문학으로까지 이어져 기다란 추억을 남겼다. 교사로서 나쓰메 소세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먼저, 나쓰메 소세키의 시학이라고 할 만한 짤막한 하이쿠 강의가 눈에 띈다. 


“하이쿠는 레토릭을 바짝 달인 것이다.” “쥘부채의 사북 자리와 같은 집주점(集注點)을 지적하여 묘사하며, 퍼져 가는 연상의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꽃이 지니 눈이 내린 듯하다, 같은 상투적인 묘사를 진부하다고 한다.” “가을바람, 허연 나무 활에 덩굴 뻗네 같은 구는 가구(佳句)다.” (158쪽)


언어를 극도로 절제하려면, 사람들의 주의가 한 집중할 수 있도록 신선한 표현을 찾아야 하며, 그로부터 연상의 세계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도 시에 입문하려는 이들이 명심할 만한 말이다.

이후로 길게 나쓰메 소세키와 저자 사이에 있었던 일화들이 펼쳐진다. 하나같이 정감이 넘치고 소세키의 소탈하면서도 고매한 성품을 잘 드러내는 일화들이다.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가 가르친 것이 문학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데라다 도라히코는 말한다. 


선생님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하이쿠의 기교를 배웠을 뿐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눈으로 발견하는 방법을 배웠다. 또한 사람 마음속의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하고, 진실한 것을 사랑하고 거짓된 것을 미워해야 함을 배웠다. (171쪽)


이것이 바로 문학자의 시선이 아닐까. “자연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눈으로 발견하는 방법”이나 “사람 마음속의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하는 것 말이다. 아름다움을 자신의 눈으로 발견하면 표현이 상투성을 벗어나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면 언어가 자유로워진다. 예수의 말처럼,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세키한테는 문학과 교육이 처음부터 하나였던 셈이고, 아마도 그것이 소세키의 인생 자체였던 것이다. 제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 스승이란 얼마나 행복한가.


여러 불행으로 마음이 무거워졌을 때에 선생님을 뵙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마음의 짐이 가벼워졌다. 불평이나 번민으로 마음이 어두워졌을 때에 선생님과 마주하고 있으며 그러한 마음의 먹구름이 말끔히 날아가 버리며, 새로운 기분으로 내 일에 전력을 쏟을 수 있었다. 선생님의 존재 그 자체가 마음의 양식이 되고 약이 되었다. (171쪽)


이것이 진짜 선생님이 아닐까. 바라만 보고 있어도, 이야기 한마디만 나누어도, 인생의 길이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 도라히코의 글을 읽다 보니 내 문학의 마음속 스승 나쓰메 소세키 소설을 전독(全讀)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 당장, 선생님을 만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