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에 쓰는 서평, 이번 주에는 『여행, 길 위의 철학』(책세상, 2017)을 다루었습니다. 여행을 통해서 지혜를 얻었던 철학자들의 삶을 다룬 책입니다. 이탈리아에서 나온 책답게, 이 책에 나오는 여행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책에 나오는 철학자들은 이탈리아를 지혜의 땅으로 만드는 데 복무합니다. ‘공간인문학’의 측면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국내에서도 이런 기획이 나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길 위에 서자 지혜가 찾아왔다
― 마리아 베테티니·스테파노 포지 엮음, 『여행, 길 위의 철학』(천지은 옮김, 책세상, 2017)
철학자들의 여행에 대한 책이지만 여행자들의 철학에 대한 책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때때로 정치적 탄압을 피하거나 개인적 야망을 달성하려는 동기가 있었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답게 철학자들의 여행은 주로 새로운 지혜를 얻는 일로 끝났다. 아니, 철학자가 아닐지라도 여행은 반드시 크고 작은 지혜를 불러들이는 듯하다.
집을 떠나서 낯선 땅에 이른 여행자에게는 아무 익숙함도 없다. 그는 고향땅에서 가졌던 일상적 삶의 익숙한 감각과 도덕을 조롱당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경이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조롱을 잊고 제자리로 돌아가지만, 예민한 몇몇은 세계가 흔들리는 것 같은 강박에 사로잡혀 치열한 내적 전투를 치른다. 지혜란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서 그들이 겪은 내적 지진의 결과, 즉 사유의 새로운 ‘동적 균형’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여행, 길 위의 철학』은 여행이 낳은 지혜의 역사를 다룬다. 솔론의 여행이 시초다. 나중에 민주주의로 자라날 법률을 아테네에 도입한 직후인 기원전 580년, 솔론은 다른 지역에 더 좋은 법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여행을 떠난다. 타자를 확인해 자신을 가늠하는 일이 ‘지혜’의 시작이다. 솔론은 지혜를 사랑해 고향을 떠난 최초의 기록된 존재에 해당할 것이다.
여행의 종착에는 ‘떠돌이 도망자’ 니체가 있다. 니체는 인간주의라는 사슬에 묶여 있는 사유를 해방하려고 했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외로움 탓일까. 그는 ‘인간을 넘어선 인간’(초인)의 출현을 선포한 후 광기에 사로잡혀 사유의 한계 바깥으로 도주해 버린다.
니체 이후로도 철학자들이 여행을 멈추었을 리는 없지만, 솔론으로부터 시작해서 니체에게서 끝나는 이러한 배치는 살짝 상징적이다. 그리스에서 이성이라는 모형에 사유를 가둔 때로부터 지혜의 여행을 떠나서, 그러한 모형이 결국 인류의 질병으로 화해 붕괴를 일으킨 자리에서 종말을 고하니까 말이다.
먼저, 철학이 탄생했다는 그리스 아테네로 떠나 보자. 우리의 흔한 상식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 프로타고라스, 디오게네스 등 수많은 철학자들은 아테네에서 ‘시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행자였고 유학생이었고 이방인이었으며, 법적인 신분은 ‘체류외인’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논술학원 원장이나 강사로 일하는 ‘이주노동자’였다.
시민들에게 변론을 가르치는 아카데미아를 세우고 지혜의 전도사로 활약했지만 아테네에서 그들은 ‘손님’이었다.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며, 대부분은 그럴 생각을 아예 단념했다. 따라서 ‘평등한’ 시민 사이의 자유로운 토론으로부터 철학이 탄생했다는 신화는 아마 기껏해야 일부만 진실이다. 아마도 그리스 삶의 또 다른 원리가 작동한 후에야 ‘지혜에 대한 사랑’은 간신히 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그네와 걸인은 모두 제우스에게서 온다”는 『오뒷세이아』의 한 구절로 압축되는 환대의 정치경제 말이다.
외국인 철학자들은 아테네 시민의 환대를 통해서만 거기에 있을 수 있었고, 아테네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지지 않는 타자의 이점 덕분에 ‘초월적’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외국인들도 몰려든 군중 앞에서 지혜의 경연을 열어 웅변을 한 후,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자유롭게 자신을 뽐낼 수 있는 올림피아 제전이나 지혜의 집적물인 책들을 판매하고 낭송했던 서점의 존재야말로 아테네의 진짜 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혜로운 이방인이 몰려들어 사유를 겨루고 그 흔적을 남김으로써 나날이 아테네적 사유가 풍부해졌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이 다루는 이름들은 정말 화려하다. 철인 정치를 실현해 보고자 시라쿠사까지 갔던 플라톤의 여행은 어떠했을까. 심지어 그는 군주의 노여움을 산 끝에 노예가 되어 팔린 적도 있었지만, 이상을 실현하려는 여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책에 따르면, 철학은 도로와 항로를 따라 퍼져 나가 곳곳에서 꽃을 피운다. 그리스 철학자 아폴로니우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만든 길을 따라서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찾아가 지혜를 구했다. 역으로 인도의 현자는 그리스어로 대화를 나눌 정도로 아테네의 사유에 익숙하다. 이들은 말 그대로 ‘세계 시민’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출세를 위해 건너온 혼혈 청년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를 정립한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물론이고, 이슬람 철학의 기둥을 놓은 이븐 시나와 알 가잘리도 지혜를 구하는 여행자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행을 진리 탐구의 수단으로 삼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함으로써 답을 찾아 세계에 대한 의심을 없애려 했다. 체사레 베카리아, 루소, 스탕달, 칼라일, 바쿠닌 등도 지혜의 여행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여행자는 마태오 리치와 라이프니츠 두 사람이다.
마태오 리치의 여행은 특이한 감동을 준다. 그는 유럽-기독교라는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동양적 삶의 태도를 수용하여 덕을 갖춘 선비로 적응해서 살아가다가 북경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사이에 그는 ‘교우’라는 말로써 유럽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두 세계를 하나로 묶는 새로운 사유를 발명했다. 그 사유는 “인간의 삶이란 우주의 명령에 순종하고 공동선을 추구할 때 비로소 정의롭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세계 ‘내부에’ 있지 않고 세계와 ‘함께’ 있는 것”을 택했다. 이 때문에 그는 평생 길 위에서 살았다. 그의 여행은 “점점 다양해지고 점점 대립적이 되어가는” 세계 속에서 “신성로마제국, 보편교회, 학자 공동체”로 상징되는 “정치․종교․문화적 세력” 사이의 공존을 이룩하려는 거대한 야심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모나드’가 있다면, 분명히 그 이름은 ‘관용’일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면서 예기치 못한 갈등이 폭발하는 중이다. 자기 지역에 평생 속박되었던 과거와 달리, 교통의 발달에 따라 세계가 급속히 좁아지면서 우리 모두가 잠재적 여행자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 책에 담긴 여행자들은 ‘공생의 원리’를 우리에게 환기한다. 인류의 지혜는 타자에 대한 환대와 관용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데모크리토스가 말한 것처럼, 그러한 지혜에 적응하는 “현자에게는 전 세계가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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