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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공감과 성찰

고맙다, 그저 고맙다 _영혼에 참된 휴식을 주는 마법의 언어(세계일보)

* 세계일보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이것으로 올해의 인사를 대신합니다. 아듀 2015년, 한 해 동안 여러모도 도와주시고 살펴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그저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며칠 전 아들한테서 문자가 왔다. 대학에 합격했다고 찍혀 있었다. 초조하고 불안했는데 시름이 탁 놓였다. 삶이 하나의 고비를 넘은 느낌이었다. 순수한 기쁨이 가슴속에서 솟아올랐다. 그 순간, 갑자기, 깨달았다.

어머니는 나한테 좋은 일이 있으면 항상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불초자로서 나는 오랫동안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때로 낯설고 때로 어색했다. 머리로는 받아들이는데 마음으로는 거리가 있었다. 살면서 아직 그 순간을 제대로 겪어 보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데 아들의 문자를 몇 번이고 읽다 보니 뭉클해지면서 입술에 저절로 말이 걸렸다.

“고맙다.”

아아, 살아가면서 간신히 배우는 것은 얼마나 많은가. 살아야 알 수 있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삶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오직 시간의 누적을 통해서만 제대로 익힐 수 있다. 어머니 입술을 좇아서 지금껏 말을 닦았건만, 이 한마디를 온전히 쓰는 데에만도 50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언어의 갈피는 아직도 얼마나 많은 뜻을 숨겼을 것이며, 또 말의 틈은 얼마나 깊은 의미를 감췄을 것인가.

시인 김선우는 고마움을 “머리가죽부터 한 터럭 뿌리까지 남김없이” “잡숫는 것”(「깨끗한 식사」)이라고 했다. 고마움은 타자가 베풀어준 호의에 대한 답례 표현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전적인 환대다. 당신의 존재 자체를 한 뿌리조차 남기지 않고 모조리 수용하는 일이다. 바다가 강물을 받아들이는 것 같은 완전한 수동성이자 궁극의 능동성이다. 고마움은 먹는 일이 아니라 잡숫는 일이다. 나를 낮추는 능동을 통해 당신을 내 안으로 들이는 수동이다. 당신이 나한테 무얼 해주어서 아니라 당신이 있어서 그냥 신통하고 대견하다.

“그저 고맙다.”

말씀하신 어머니는 시인이자 무용가다. 힘 있는 말은 교언이 아니라 눌언이며, 우아한 동작은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다. 정말 간절한 마음은 절제된 말과 간략한 동작으로만 전할 수 있다. 어머니는 부사 하나를 살짝 덧대면서 내 손을 꼭 쥐셨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나한테 전하셨다.

행복을 좇는 자는 모두 불행하다, 행복한 상태로 가려는 자는 모두 불운하다, 행복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그러니 미래를 행복으로 만들려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행복으로 받아들여라. ‘그저’라는 부사는 말한다. 행복은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다. 놀이터에 들어선 아이처럼, 첫눈에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순간에 대한 전적인 몰입, 타자에 대한 완전한 헌신으로 이룩된다. 첫머리 자음 기역의 중첩을 통해 리듬을 부여하면서 ‘그저 고맙다’라는 말은 그 뜻을 견고하게 전달한다.

그때는 미숙해서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다. 어쩌면 참된 지혜란 모두가 듣는 순간에는 알아먹지 못하도록 생겨먹었을 수 있다. 사람 안에서 천천히 익어 가야 제 맛이 나는 복류(伏流)의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독일의 문호 헤르만 헤세는 「행복」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은 바 있다.


네가 행복을 추구한다면

행복할 만큼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바라던 것들을 네가 모두 가졌을지라도.


잃어버린 것을 아까워하고

목표를 이루려고 안달하는 한

너는 아직 평화를 모르는 것이다.


바라던 것을 모두 단념하고

목표도, 욕망도 모두 잊고

네가 행복을 입 밖에 내지 않을 때


행동의 물결이 네 마음에 가 닿지 않으면서

비로소 네 영혼이 쉬리라.


헤세는 말한다. “행동의 물결”이 마음을 조바심 나게 할 때, 무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마음을 지속적으로 건드릴 때, 영혼이 휴식하는 참된 행복은 없다고. 어머니의 ‘그저 고맙다’라는 말씀에는 아무 ‘추구’가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순수하게 긍정한다. 조각칼을 한 차례 크게 부려 삶을 보석으로 세공하는 장인의 담대함이 있을 뿐이다. 흘러간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다가올 날에 대한 안달이 없는 순전한 평화를 선포한다.

세상은 점점 카오스로 치닫는 중이다. 지옥 같은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지쳐 있다. 모두 영혼에 참된 휴식을 가져다주는 마법의 언어를 다시 배우자.

“고맙다. 그저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