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 422호에 기고한 「‘속도의 편집’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입니다.
‘속도의 편집’은 단순히 “책 빨리 내!”라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이 부분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세상 변하는 속도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기획했던 이슈들은 빠르게 낡아서 독자들 관심 밖으로 사라져 버리고, 어느새 새로운 이슈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대응하려면 기획과 출간 사이의 간극을 최소화하는 빠른 속도가 얼마만큼 필요합니다.
하지만 편집과 속도가 만나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언론이나 방송과 같은 다른 미디어들이 권력이나 자본의 힘에 억눌려 언중에게 전해야 할 바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할 때, 느린 미디어이자 소수 미디어였던 출판이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1980년대에는 무크라는 형태의 잡지를 통해, 사회과학 출판이라는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한국 출판은 필요할 때 자기 소명을 뚜렷하게 한 바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출판은 다시 시대로부터 어떤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책이 아니면 전할 수 없는 진실들, 즉 한없이 넘쳐나고 곧 사라지는 정보들 속에서 권력이나 자본이 은폐한 것들을 폭로하고 앞길의 방향을 빠르게 잡아주는 지혜가 우리한테 요청되는 중입니다. 뉴스타파와 같은 새로운 미디어들이 그 일에 나서고 있습니다. 출판 역시 어떤 식으로든 같은 문제에 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날마다 싸우면서 자유와 생명을 이 세계 내에서 확인하고 이룩하려는 실학의 편집. 이런 편집을 ‘속도의 편집’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속도의 편집’이란 무엇인가?
가노 마사나오의 『이와나미 신서의 역사』(기미정 옮김,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16)는 책으로써 어긋난 시대와 싸우고자 하는 편집자한테 아이디어의 무한한 원천을 제공한다. 이 책이 출간된 후 이와나미 신서의 목록까지 세 차례 반복해 읽는 과정에서 편집을 바라보는 관점 하나가 마음에서 뚜렷해졌다. 느리지만 확실한 지식 또는 지혜를 추구하는 익숙한 편집보다 파우스트의 수제자가 되어 현시대의 문제를 끌어안은 채 피투성이로 싸우는 ‘속도’의 편집 말이다.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편집을 분류해 학생들에게 가르치다 보면, 편집이 아주 복잡하지는 않음을 깨닫는다. 시간의 오랜 시련을 견뎌낸 저술들을 다루는 ‘고전’의 편집, 수업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리된 지식을 다루는 ‘학술’의 편집, 생활인의 필요에 대응해 그 충족 방법을 다루는 ‘실용’의 편집, 각종 시험 및 자격증에 대비해 그 요령을 제공하는 ‘수험’의 편집, 여가 시간을 의미 또는 흥미로 채우려는 이들을 위해 지적, 정서적, 말초적 쾌락을 충족하는 ‘즐거움’의 편집 등이다. 각각의 편집마다, 또 그 안에서 다루는 대상마다 완전히 다른 자질과 능력을 필요로 하기에, 현실의 편집은 무한히 다양하다.
‘속도’의 편집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파우스트』는 말한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것이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차지하는 사람만이 누릴 만한 것이다.” 황혼이 되어야 비로소 날개를 펼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되기를 거절하고, 날마다 싸우면서 자유와 생명을 이 세계 내에서 확인하고 이룩하려는 실학의 편집. 일반적으로 볼 때, 책은 전혀 속도의 미디어일 수 없다. 편집이라는 촘촘한 거름망을 따로 두고 정보의 지속성을 깊게 시험한 후 고정하는 행위야말로 출판의 가장 주된 힘을 이룬다.
하지만 속도의 편집은 출판의 이러한 오래된 역할 놀이를 거절한다. 사건이 일어나는 자리에서 곧바로 정보를 생성하고 소비하는 순간 미디어의 시대에 올라타는 동시에 짧고 가벼운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가 범람하는 스낵컬처 세태를 뛰어넘으려 한다. 물론 싸우기는 날마다 싸우지만 책은 천천히 출판하는 길도 있다. 대다수 편집자가 여기에서 ‘오래된 미래’를 상상한다. 이슬을 모아서 꽃을 피우는 선인장처럼, 지혜를 이룰 때까지 정보를 온축해 깊이와 높이를 이룬다. 어쩌면 지혜를 필요로 하는 온전한 인간이 있는 한, 출판의 이러한 태도는 아마도 영원할 것이다.
속도의 편집은 진지전이 아니라 전격전에 가깝다. 시대의 현장을 빠르게 정리해 보고하고, 그 사태에 대응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통찰을 순간적으로 독자에게 제공하려는 마음에서 이루어진 편집이다. 시대의 사태에 빠르게 대응하되 사실의 단순한 전달(이는 신문이나 잡지의 임무일 것이다)에 중심을 두지 않고 사태의 이면을 꿰뚫어 보면서 시대의 요동에 공명하고 사회의 움직임에 개입하려는 초현대적 편집이다. 그러나 속도의 편집이 출판의 역사에서 아주 낯선 출현은 아니다. 신문, 잡지, 방송 등 여러 미디어 기구들이 자발적/비자발적으로 반지성(反知性)을 강요당할 때, 소수 미디어였던 출판이 항상 그 역할을 기꺼이 떠맡아 왔다. 이와나미 신서(新書)의 탄생은 이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이와나미 신서는 중일 침략 전쟁의 발발 직후인 1938년, 일본 전체가 천황제를 앞세운 군부의 폭압 속에서 ‘근대의 초극’과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사이비 이념에 빠져드는 시기에 지성의 회로를 복구하려는 의지를 담아 대담하게 기획되었다. 태평양 전쟁에 대한 두려운 예감 속에서, 시대의 여러 문제에 그 순간의 감각으로 곧바로 응전하려는 뜻이었다. 이 신서를 처음 기획하고 이를 편집한 요시노 겐자부로는 말했다.
지금 이 시국을 이대로 흘러가게 두어서는 안 된다. (중략) 하다못해 현재 상황 속에서 비합리적인 강압에 견디며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잠깐의 시간을 제공할 수 있을까? (13쪽)
지금 이 시국에 대한 비상 개입은 ‘속도의 편집’의 기본 전제다. “비합리적 강압”이 횡행하는 시국의 흐름을 책으로 틀어막고, 독자들에게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시간을 잠시라도 제공함으로써 지식의 새로운 기도(氣道)를 개척하려는 힘센 뜻 없이 속도의 편집은 불가능하다. 한 사회가 몰락과 파멸로 치닫고 시민 전체가 좌절과 절망에 빠져드는 상황에서 잦은 검열과 대대적 탄압으로 언론 기능이 마비되면서 공론장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출판은 새로운 형태의 책을 통하여 입이 없는 자들에게 혀와 입술을 기꺼이 빌려준다. 이와나미 신서의 「발간사」는 당시의 시대에 대해 준엄한 어조로 묻는다. 이와나미 쇼텐의 창립자인 이와나미 시게오가 직접 쓴 글이다.
정당은 건재한가, 관료는 독선에 빠져 있지 않은가, 재계는 봉공의 정신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 무인에게 고매한 견식과 일사불란한 통제가 있는가, 학도가 진리를 좇는 것이 과연 목마를 사슴이 물을 찾는 것과 같은가. (중략) 비판적 정신과 양심적 행동이 모자라 툭하면 세상에 아첨하고 권세에 빌붙는 낌새는 없는가. 편협한 사상을 가지고 충성스러운 진보 인사를 멀리하며, 국책 방침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언론을 통제하고 민의의 창달을 저해하는 경향은 없는가. (15쪽)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와 문제가 별다르지 않다. 정녕 참담한 일이다.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면서 말썽이 되풀이된다는 것, 이는 후진성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권력 자체의 속성일 수 있음을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출판 역시 그 긴급한 강도에 발맞추어 시국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를 항상 갖추어야 한다. 이와나미 시게오는 말한다.
현재의 문제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 쓰게 하는 것이다. 애초에 수명은 길지 않아도 된다. 생생한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12쪽)
속도의 편집은 초시대적 지혜를 표적 삼지 않는다. 수명을 길게 잡아 오래도록 독자를 만남으로써 소수 미디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스테디셀러 전략은 속도의 편집과 어울리지 않는다. 설령, 어떤 책들이 살아남아 길게 독자들 사랑을 받을지라도, 그 현상은 기획 의도와 관련 없는 우발성의 산물일 뿐이다. 속도의 편집에서 중심에 있는 것은 이 시대의 ‘생생한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라는 괴테의 말처럼, 속도의 편집은 회색의 지혜가 아니라 생명의 약동을 포착한다. 즉, “현대의 문제를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쓰게 하는 것”이다. 지나고 나서 기억하거나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한복판에서 책을 시국의 흐름을 탈주시키는 도구로써 기꺼이 사용하는 것이다.
이와나미 신서는 시대의 폭압 속에서 지성이 정지하는 긴급한 사태를 구제하려고 기획되었지만, 오늘날 한국의 출판에서 속도의 편집은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의 폭주로 인해 생겨난 반지성주의의 확산과 치열히 싸우는 상황으로부터 요청된다. 대안연구공동체가 기획한 ‘인문학, 삶을 말하다’가 출판되었을 때, 필자는 이를 ‘대낮의 출판’이라는 개념으로 옹호한 바 있다.
오늘날 한국 (문학/인문학) 출판은 대학에 심각히 예속되어 있다. 이미 여러 번 지적된 바 있지만, 대학 평가가 시작되고 이에 맞추어 한국연구재단 시스템이 도입된 이래 많은 학자들은 전문적인 논문을 생산해 호구를 해결하는 데 이미 지쳐 버렸다. 이에 상아탑의 지식과 사회적 이해 관심 사이의 힘찬 통로이자 엄혹한 검증 도구인 ‘단행본’을 쓸 힘이 전반적으로 고갈되었다. 신선하지 않은 재료로 좋은 요리는 불가능한 셈이다. 사태가 벌어지는 현장에 지식을 공급하여 통찰을 제공하려는 출판의 시도는 좌절되기 쉬워졌고, 그 탓에 외래의 책들이 주로 독자의 관심사로 호출되기 일쑤였다. 문제가 있는 곳에 지식을 데려가는, 이른바 ‘지식의 민주화’는 출판의 꿈이다. ‘지금 이 순간’을 뜨겁게 성찰하는 ‘대낮의 사유’야말로 책이라는 요리를 제대로 만들기 위한 필수 조건일 터인데, 이 필수가 뿌리부터 썩어 버린 것이다.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 열두 권이 출판되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길밖의길, 2016)를 쓴 철학자 허경은 “오늘의 문제에 직면한 나는, 그리고 우리는 과거의 생각들을 십분 참조하되 그것들을 벗어난 오늘의 새로운 나, 새로운 우리를 실험하고 창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나미 시게오의 생각과 아주 다르지 않다. 철학의 눈으로 ‘오늘의 문제’를 폭로하고, 새로운 우리를 실험하고 창조하는 중대한 과제를 수행하려는 기획의 뜻이 되돌아온 것이다. 억압이 있으면 반드시 되돌아오는 것도 있다. 적대성이다. 사회의 지배적 주류와 생각과 이익을 같이하지 않는 적대적 사고의, 이른바 비판이라고 불리는 사유의 (재)창조야말로 오늘날 자본의 폭주로 인해서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 독점되고 또 세습되는 ‘개돼지’ 사회의 등장으로부터 출판이 인간성의 한 보루이자 게릴라전 수행을 위한 무기로서 책을 정립할 중대 이유이다. 이로써 속도의 편집이 지향하는 것은 ‘적대성의 연대’를 통한 ‘새로운 인간/사회의 발명’이다.
사태가 일어난 현장으로부터 시공간적으로 가깝고, 저비용 또는 저자본으로 생산 또는 소비가 가능하며, (서점만이 아니라) 서점 바깥의 네트워크와 충분히 결합된 출판 말이다. (중략) 이 책들은 단순히 저자의 쓰기와 독자의 읽기를 이어주려고 출판되지 않았다. 이 책들은 그보다는 시민들 사이에서 대화를 발생시키고 또 다른 비자본 연대를 만들어내는 도구로 제공되었다. 따라서 이 책들은 시민단체에서, 독서모임에서, 학교수업, 강연회 등 다양한 자리에서 토론의 도구로서 쓰일 때 제대로 읽힌다고 보아야 한다.
‘속도의 편집’에서 지향하는 것과 아주 유사한, 현장에 곧장 지성을 투입하는 담론 형식으로 사설이나 칼럼이 있다. 하지만 칼럼은 생각의 결과나 입장을 전할 수 있지만, 생각의 방법 또는 과정을 공유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스낵컬처의 한 형태로 주로 소비될 뿐, 즉 ‘좋아요’를 생산할 뿐 독자의 내면에서 사유 자체를 이룩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칼럼이나 사설은 말단의 사유를 전달하지 사유 과정까지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유의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은 일정한 길이의 지배를 피할 수 없다. 책은 정신에 직접 “폭력을 행사하는 사물”에 속한다. 독자들한테 책은 사유의 결과만이 아니라 생각하는 행위까지, 사유하는 능력까지 배우도록 강요한다. 책은 생각과 생각의 만남, 즉 쓰는 사람이 배치한 기호가 읽는 사람의 의식에 새겨지는 과정이다. 결과는 전혀 다르다. 칼럼은 주로 추종자를 만들어 내지만, 속도의 편집이 생성한 책은 사유하는 타자를 배태한다.
미래가 간단없는 충격으로 다가오고 감각의 혁신이 일상화된 세상은 정보의 교환을 가속화한다. 온갖 정보가 오감을 온통 유혹하는 정보 과잉은 오늘날 지성을 심각한 기능 부전 상태로 몰아넣는다. 지식과 정보의 흔한 과잉으로 인해, 인간의 지적 능력은 만성피로 상태에 놓여 있다. 지식과 정보를 자유롭고 풍요롭게 수용하지만, 이를 받아들여 사유를 갱신하고 자기 이야기를 새롭게 다시 쓸 수 없는, 그리하여 말초신경은 영원히 흥분 상태로 발기되어 있지만 두뇌는 사실상 잠들어 있는 클리셰의 노예들, 유리섬유에 묶인 채 이미지의 벌꿀을 빨아먹으면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니콜라스 카)이 전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중이다.
‘속도의 편집’은 말초신경의 이러한 발기에 저항한다. 편집이라는 중대한 능력을 이용해 정보의 과잉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고 애쓴다. 사유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의 등장 자체를 즐기고 소비하는 인간의 출현은 몽테뉴 이후 철학의 오랜 주제였다. 일상의 지루함을 날려 주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거기에 몰두하지만, 금세 시들해지고 망각하면서 또 다른 흥밋거리를 찾아서 떠도는 병든 인간(데카당)의 전면화는 현대 사회의 가장 심각한 병리를 이룬다. 감각의 과잉 발기를 영원히 유지함으로써 문제 해결에는 무능한 지적 발기 부전을 은폐할뿐더러 이를 사실상 부추기는 시국의 흐름에 ‘속도의 편집’은 책으로써 보를 쌓아서 저항을 만든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주목할 움직임을 보이는 출판사는 동아시아다. 이른바 ‘스낵 사이언스’를 표방하는 이 출판사의 ‘과학하고 앉아 있네’ 시리즈는 “‘지금-여기’의 과학적 이슈와 주제를 골라 우리 모두의 폭넓은 공감을 추구하는 토크형” 서적이다. 공룡, 유에프오, 양자역학, 초신성 등을 다룬 150쪽 내외의 가벼운 책이 현재까지 5권 정도 출판되었는데, 팟캐스트를 이용해서 작업하기 때문에 대중성과 현장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서너 달 이내의 최신 과학 뉴스까지 성찰적으로 담아낸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하지만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오정근의 『중력파』, 김대식의 『인간 대 기계』, 정아람의 『이세돌의 일주일』, 감동근의 『바둑으로 읽는 인공지능』으로 이어진 일련의 기획들이다. 이 기획들이야말로 ‘속도의 편집’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중력파나 인공지능 같은 거대한 과학적 사건들로부터 짧게는 한 달, 길어야 두 달이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쏟아져 나온 이 책들은 ‘속도의 편집’에 필요한 자질이 단지 예측만이 아니라 적절한 실행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과학자들과의 꾸준한 네트워크 없이, 이를 뒷받침하는 맞춤한 편집 구조 없이는 출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기획들이다. 한편, ‘세월호 사건’을 둘러싸고 김탁환의 추리소설 『거짓말이다』(북스피어, 2016)에 이르기까지 여러 출판사에서 쏟아져 나온 일련의 기획도 시국의 흐름에 대한 한국 출판의 응전력이 한껏 높아졌음을 잘 드러낸다.
속도의 편집은 단지 책을 어떤 사태에 맞추어 책을 빠르게 출판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문제가 있는 곳에 지식을 배치함으로써 ‘지식의 민주화’를 이룩하려는 출판의 오랜 꿈을 계승한 것인 동시에, 다른 미디어들이 기능 마비 상태에 있을 때 시국의 흐름에 긴급하게 개입하려는 기획이고, 새로운 사회/인간을 창조하려는 실천이기도 하다. 오늘날 속도의 편집을 활성화해야 할 까닭은 아주 분명하다. 자본의 폭주로 인하여 사회 전반에서 반지성주의가 선연히 퍼져 나가는 상황에서 이를 견제하여 공론의 장을 열어야 할 신문, 잡지, 방송 등 언론의 기능은 오히려 마비되어 가는 긴급한 상황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속도’를 개념 삼아 적대성의 사유를 퍼뜨리고, 지성의 정수를 확산하는 편집적 실천이 활성화되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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