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혁명의 세례를 입고 등장한 전자책은 인간과 책을 연결하는 방식(인터페이스)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분명한 형태로 보여 주었습니다. 요즈음 많이 이야기되는 오디오북이나 증강현실 책 등도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책입니다. 출판의 역사는 책이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고 이를 적용해 끝없이 진화해 왔음을 보여줍니다. 종이책이라고는 하지만, 겉은 비슷해 보여도 스무 해 전의 종이책과 지금의 종이책은 전혀 똑같지 않습니다. 그 세월을 출판 현장에서 살아온 분들은 선명하게 느끼고 있을 겁니다. 오늘날 출판의 가치사슬이 흔들리면서, 인간과 책을 잇는 인터페이스를 혁신하는 시도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는 시도나 실험이 곧 가치입니다. 그중에서도 책과 놀이를 결합한 ‘토이북’은 사업적으로 가장 놀랍고 뚜렷한 성과를 내고 있는 분야입니다. 아래에 옮겨둔 글은 토이북 시장의 등장 이유와 현황을 요약한 것으로 《기획회의》 제418호에 실었습니다.
토이북, 놀이와 책이 만나다
초보 편집자 시절에는 항상 ‘출판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1990년대 초다. 종이책 중심으로 짜인 출판의 정체성은 분명했지만, 질문을 통해서 스스로 방향을 잡아 나가려고 묻고 대답한 편이다. 개별 출판사는 몰라도, 출판 시장 전체는 항상 축제였다. 해마다 매출이 늘어나고, 새로운 출판사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1990년대에 1만 개에도 못 미쳤던 출판사 숫자는 밀레니엄을 새로 맞이하기 전에 이미 두 배로 증가해 있었다. 중간에 외환위기를 맞아 잠시 휘청거렸지만, 출판산업의 해마다 도약을 막지는 못했다.
아무나 대학생(1980년대에 이루어진 고등교육률의 비약적 상승), 누구나 외국물(여행 자유화 등 세계화의 급속한 진행), 모두가 중산층(노동자 대투쟁 등으로 간신히 쟁취한 소득 상승) 등으로 요약되는 사회구조 변동에 따라 새로운 지식을 갈망하는 교양층이 증가하면서 대중출판의 시대가 열리고, 1993년 WTO 가입 이후 해외 저작권이 한국 시장에서 법적으로 보호를 받으면서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는 해외 저작물들이 속속 번역되어 봇물처럼 쏟아졌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풍요의 시대였다. 북 프로듀서 같은 허무한 이름 아래, ‘외서 기획’과 ‘본문 연출’이라는 지식 수입 사업술을 편집자의 주요 본분으로 둔갑시킬 정도였다. 덕분에 지식 생산의 아방가르드여야 할 편집자의 근본 역량이 별로 축적되지 못한 탓에 출판사에 대한 편집자의 예속성이 오히려 심화되는(본문 좀 만질 줄 알고 외국어 좀 할 줄 아는 이들로 언제든 대체 가능한) 반성의 시대이기도 했다.
요즘 들어서는 ‘무엇이 출판인가’를 주로 묻고, ‘어떻게 하는 것이 출판인가’를 가끔 묻는다. 한국 출판을 잡아매던 오래된 가치사슬이 거의 해체되고, 저자와 독자, 쓰기와 읽기를 연결하는 출판 인터페이스를 혁신하려는 시도들이 꾸준히 출현하는 중이다. 출판사는 서점을 건너뛰거나 서점을 직접 운영하면서 독자를 관리하고 서점은 스토리 플랫폼 등을 통해 저자를 확보한다든지, 출판이 종이책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페이퍼 비즈니스를 넘어서 복합화 또는 융합화를 통해 콘텐츠 비즈니스로 나아간다든지, 블로그나 카페나 팟캐스트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콘텐츠 마케팅이 유행한다든지, 컬러링북이나 초판 디자인 복제판이나 마케팅 제휴 판본 같은 곁다리책이 출현한다든지 하는 일들이 더 자주, 더 꾸준히 나타나는 중이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 중에서 출판 현장의 시각에서 볼 때, 사업적으로 실제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현실감 넘치는 출판 분야가 바로 놀이와 책을 하나로 이은 ‘토이북’ 또는 ‘플레이북’ 또는 ‘활동책(Activity Book)’ 영역이다. 아직은 주로 영유아 시장을 중심으로 시도되지만, 색칠, 필사, 기록, 공작, 탐사 등 다양한 활동 형태로 서서히 성인 시장으로 확장되는 중이다. 이 종류에 속하는 서적들은 출판시장의 전반적 위축에도 산업 내 비약적 성장이 실제 숫자로 확인된 매력도 높은 투자 영역이기도 하다. 모바일 기기의 광범위한 보급에 따라, 정보 중심 콘텐츠가 페이퍼 미디어에서 스크린 미디어로 급속히 이동 중인 요즈음, ‘+α’를 통해 책의 사용성을 재구축함으로써 독자 가치를 높이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2016년 상반기 예스24 베스트셀러에 오른 도서를 살펴보아도 현상은 뚜렷하다. 포터 스타일의 『5년 후 나에게 Q&A a day』(토네이도), 윤동주의 『초판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소와다리), 전한길의 『2016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에스티앤북스)가 종합 베스트셀러 20위 안에 들었으며, 분야별 베스트셀러에도 배르벨 바르데츠키의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GIFT SET』(걷는나무), 매트 졸러 세이츠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아트북』(윌북) 등이 상위권에 포함되었다. 여성복 브랜드 키이스와 제휴해 세계문학전집 3종의 콜라보레이션 에디션을 내놓은 민음사의 파격적 시도까지 포함하면 리스트는 더욱 늘어난다.
이러한 시도를 둘러싸고 출판 내부에서는 ‘책이란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드문드문 벌어지곤 하지만, 일시적 유행이나 거품으로 보기에는 그 뿌리나 역사가 의외로 깊다. 아마도 출판의 역사와 나란할 정도일 가망성이 아주 높다. 특히 놀이와 공부가 전혀 구분되지 않는 영유아 분야의 경우에는 분명히 그럴 것이다.
구텐베르크 혁명 이후, 불과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때, 이미 코메니우스(1592~1670)는 영유아의 감각 전체를 자극할 수 있도록 그림책을 발명했으며, 철학자 로크(1632~1704)는 장난감이나 게임 등을 교육 도구로 쓰려고 로크 블록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은 페스탈로치를 거쳐 프뢰벨과 몬테소리로 이어졌으며, 이들은 각각 은물이나 감각 교구 등을 창안함으로써 교구와 학습을 결합한 놀이교육 모델을 통해 영유아의 인지 및 감성 발달을 돕고자 했다. 피아제, 에릭슨, 비고츠키 등 20세기 심리학자들도, 유아의 경우에는 놀이를 통한 학습이야말로 아동 발달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이 문단은 박찬옥 외, 「보육프로그램 교재․교구 활용 방안」(보건복지가족부, 2009), 6~9쪽을 요약한 것이다.)
요컨대 영유아 분야의 경우, 놀이와 학습이 항상 서로 결합한 형태로 발달해 왔으며, 출판 역시 어떤 식으로든 이에 부응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영유아들은 다양한 놀이 경험 속에서 오감을 통하여 세상을 알아갈 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요인들과 다양한 상호작용을 하여 앎의 폭을 넓혀간다. (중략) 영유아 보육은 놀이 중심의 특성이 있으므로 다양한 놀이를 통해 자아를 표현하고 필요한 발달적 기능을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위의 글, 1쪽)
영유아 출판 분야의 경우에도 물론, 1993년 WTO 가입 이후 10여 년 동안 세계 최정상 그림책들이 잇따라 번역 출간되면서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고, 한국 작가들의 그림책 수준도 같이 높아지는 이른바 ‘그림책 혁명’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로 작가주의 출판이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이루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그림책 시장이 인구 감소와 시장 포화로 인하여 주춤하는 사이, 학습과 놀이가 하나로 결합된 토이북 시장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적어도 시장규모로 볼 때에는 영유아 출판의 주류로 떠올랐다.
가령, 교보문고 자료에 따르면, 판매 점유율이 2007년도에 51%에 달했던 스토리 중심 그림책은 2008년 45%, 2009년에 41%로 급속히 하락한 후 2010년대에는 주로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 중심 시장으로 재편되었다.(이런 시장은 획기적인 차별성을 갖추지 않은 신간의 시장 진입이 무척 어렵기 때문에 투자 매력도가 전반적으로 떨어진다.) 그 대신 학습책 또는 놀이책의 시장 판매가 그림책의 자리를 메우면서 시장점유율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외연조차 국내외에서 꾸준히 확대되었다. 스티커북, 색칠놀이, 입체북, 헝겊책, 사운드북, 플레이북 등이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이러한 흐름이 장기화되자, 그림책 출판의 강자인 비룡소가 영국의 출판사 어쉬본과 손잡고 어쉬본코리아를 설립해 토이북 시장에 진입했다. 이는 영유아 출판 시장의 변동을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독자들의 지출액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2008년의 세계적 금융위기와 2009년의 아이폰 출시에 따른 충격 이후 가구당 도서 구입비가 20,000원 아래로 떨어졌지만, 영유아를 둔 가구의 월평균 교재 및 교구 구입비용은 28만 원에 이른다.
[2012년 유아교육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신생아기에 영유아 교구 상품으로 지출되는 월평균 비용은 252,333원이며 영아기(13~30개월)에는 109,429원, 유아기 1단계(31~48개월)에는 24,975원, 유아기 2단계(49~72개월)에는 143,137원을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영유아 교재의 경우는 신생아기는 165,367원, 영아기 168,027월, 유아기 1단계에는 477,469원, 유아기 2단계 161,415원을 지출하고 있다. (박민숙, 「학습지, 교재·교구 등의 영유아교육상품 실태를 살핀다」, 『영유아사교육포럼 4차 연속 토론회 자료집』(사교육걱정없는세상, 2013), 28쪽.)
이는 저출산으로 인한 영유아 인구의 지속적 감소를 고려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높아짐에 따라 초혼 연령이 높아져 한 자녀 가정이 점차 늘어나고, 맞벌이 등에 따른 가계소득의 전반적 증가로 가처분 소득을 자녀교육에 투자하는 비중이 커지는 사회 트렌드를 반영한다. 이에 발맞추어 국내 베이비 산업 규모는 지난 10년 동안 거의 열 배 이상 성장했으며, ‘골드 키즈’로 집약되는 영유아 상품 자체의 고급화 경향도 무척이나 뚜렷한 편이어서 앞으로도 성장세가 좀처럼 멈추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좀처럼 조잡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저가형 상품에 머물렀던 토이북은 지난 10여 년 동안 빠른 속도로 질적 성장을 이루면서 양적 팽창도 동시에 달성하고 있다. 베이비 산업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합치되는 쪽으로 관련 서적을 꾸준히 개발해 낸 편집자들의 노력 덕분이다. 2000년대 이후, 이 분야에서 일어난 주요한 변화는 다음과 같이 집약할 수 있다. 이 부분은 토이북 분야의 관련 편집자 및 마케터의 인터뷰와 내부 비공개 자료를 요약한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영유아 도서에 대한 소비자 인식이 점차 강화되면서, 기존 아동서 시장과 차별화된 세분 시장이 형성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네모반듯한 형태의 보드북에서 벗어나 헝겊책, 목욕책, 팝업북 등 다양한 형태의 토이북 출시되었으며, 사운드북의 선풍적 인기로 다양한 형태의 사운드북이 출시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마케팅과 편집력을 고루 갖추었던 애플비가 새로운 시장 개척에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2010년 이후에는 책과 완구가 결합한 ‘북 플러스’ 출판이 대중화되었습니다. 저가 토이북이 다양한 출판사에서 출시되고 있습니다. 한국야쿠르트 같은 대기업이나 캐릭터업체인 손오공 같은 외부업체들이 인수합병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시장에 끼어들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또 다른 차별점을 만들려는 노력이 시작되었고, 블루래빗이 디자인 고급화와 효율적인 바이럴 마케팅 등으로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점차 해외 수출도 활발해지고 있고요.
독자와 독자가 연결되면서 정보의 불균형성이 해소된 시대의 출판은 단순한 계몽적 열정만으로는 어떠한 회사도 제자리에조차 있을 수 없다. 변화하는 흐름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빠르고 정확하게 자신의 출판을 진화시키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플비는 계림북스, 블루래빗은 문공사라는 전통적인 출판사에서 발원했다. 스토리 중심의 그림책 시장에 안주하지 않고, 놀이라는 요소를 책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독자 가치를 높이는 미지의 시장에 발을 디뎌서 이 분야 편집자들은 ‘토이북’이라는 하나의 줄기를 세웠다. 그 영향은 아마도 서서히 성인책 쪽으로, 아니 자신이 떠나온 대지인 그림책 쪽으로 확산될 것이다. 출판산업에는 불황이 있을 수 있지만, 출판사에는 전혀 불황이 있을 수 없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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