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간에 두꺼운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은 꽤 즐거운 도전이다. 덕분에 하루 정도 책에 온전히 헌신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래서 이 시간이야말로 책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하게 해 준다. 이번에 다룬 책은 장쭤야오의 『유비평전』(남종진 옮김, 민음사, 2015)이다. 아래에 옮겨 적어 둔다.
돗자리 짜던 유비, 황제까지 오른 비결은?
유비평전 / 장쭤야오 지음, 남종진 옮김 / 민음사
읽으면서 알았다. 마음이 문장과 호응해 스스로 기뻐하고, 몸이 이야기의 흥에 맞춰 저절로 들썩인다는 것을. 가뭄과 역병에 온 나라가 시달리는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읽기에 ‘삼국지’만큼 흥미로운 것은 역시 없다. 두꺼워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빨리 끝마치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재미있는 책은 역시 적당히 내용을 알아서 읽기에 두렵지 않고, 뜻밖의 전개가 있어서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종류의 책이다. 중국 역사학자 장쭤야오(張作耀)의 ‘유비평전’은 이러한 ‘재미있는 책’의 정의에 정확히 들어맞는 책이다.
‘삼국지연의’를 두루 섭렵했고, ‘정사 삼국지’ 역시 자세히 살폈으며, ‘후한서 본기’를 번역했고, 같은 저자가 쓴 ‘조조평전’마저 읽은 터라 이 책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익히 아는 내용이라도 식상하지 않도록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비평이 곳곳에 가미되면서 감각의 균형을 잡아주었다. 책은 유비의 인의(仁義)를 일방적으로 추앙하는 ‘촉한정통론’의 시선이 아니라, 삼국 당대와 후대의 온갖 역사적 기술을 비평해 보여줌으로써 유비의 일생을 객관적으로 조직해 간다. 저자의 논점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천하의 경영에서 군사적 재능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조조에게 미치지 못했고, 실제로 이룩한 일도 대단치 않은 인물이 어떻게 난세의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라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는가?”
유비는 삼국시대의 다른 두 주역인 조조나 손권과는 태생이 달랐다. 두 사람은 이른바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 손권은 젊은 나이에 부형(父兄)이 이룩한 강동의 드넓은 대지를 물려받았고, 조조는 비록 환관의 양자였지만 당대의 권력에 가까웠던 아버지 조등 덕분에 어린 나이에 교위에 올라 이름을 날릴 기회를 얻으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물론 두 사람에게 영웅의 풍모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회를 활용한 점이 아무래도 많았다. 유비는 아니었다. 비록 본인은 황족이라고 떠들고 다녔지만 이는 너무나 먼 옛날 일에 불과했고, 실상은 촌구석에서 돗자리를 짜서 먹고살 정도로 한미했다. 세상이 혼란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인생을 마칠 운명이었다.
황건의 난 이후, 유비의 성장은 무섭다. 전투를 거치면서 재능을 떨치고, 너그러움을 발휘해 민심을 얻었으며, 의리를 지켜서 인재를 끌어모았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 재산이 모일라치면 집안에 병자가 생기듯, 천하 한구석을 점거해 세력을 불릴 만하면 조조 등과 싸워서 모두 털어먹기 일쑤였다. 서주에서, 신야에서, 형주에서, 당양에서 유비는 싸울 때마다 그동안 쌓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거지꼴로 내빼곤 했다. 나중에는 조조가 떴다는 말만 들어도 도망칠 정도였다.
하지만 조조가 가장 두려워한 인물도 역시 유비였다. 패도(覇道)를 내세우고 재능을 앞세우는 조조의 정치와는 대극에 있는, 명분을 곧추세우면서도 교활할 정도로 유연해서 좀처럼 쓰러뜨리기 힘든 정치가 유비의 정치였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적인 힘으로는 조조와 정면으로 다툴 수 없지만, 때로는 굽히고 때로는 물러서고 때로는 웅크리고 때로는 맞서면서 계속 기회를 엿보는, 왕도(王道)의 깃발을 쳐들고 불리할 때조차 이를 끝내 버리지 않는 정신이 유비의 마음속에는 있었다. 진수의 입을 빌려서 저자는 유비의 이러한 측면을 “좌절을 겪으면서도 굴복하지 않았다”고 선명하게 평가한다.
민중이 현격한 업적을 남긴 조조를 버리고 실패로 점철된 유비를 더 사랑해 마침내 ‘삼국지연의’ 같은 훌륭한 소설까지 낳은 이유가 늘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다가 문득 작은 깨달음이 있었다. 한미했지만 남들보다 우뚝하게 정의로웠고 수없이 꺾였지만 끝내 넘어지지 않은 불굴의 삶 자체가 민중 자신의 삶과 유비되어 한없이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물려받은 것이 많은 데다 스스로 재주조차 넘쳐서 떵떵거리는 조조나 손권과 달리, 유비는 백성의 마음밖에는 자기 재산이 없음을 잘 알았다. “큰일을 하려면 사람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당양 같은 곳에서 조조의 군대가 쫓아와 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에도 백성을 버리지 않았다. “위급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믿음과 의리를 지켰고, 사태가 급박하더라도 말이 이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 위기를 통해 백성들을 오히려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비는 원소나 유표, 유장 같은 위선자들과는 달랐다. 믿음을 내세우고 의리를 숭상하면서도 거기에 헛되이 머무르지 않고, 때에 맞는 지혜를 발휘해 잔혹한 현실을 이기고 인생을 빛나게 하는 길을 찾았다. 부하들과 백성들에게는 줄곧 의리를 지켰지만, 권력자에게는 의리의 이치를 따졌다. 그래서 고통의 때를 지내고 나면 달콤한 시절이 온다는 순환의 이치를 삶으로 보였다. 백성들의 사랑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유비평전’은 유비를 중심으로 다시 쓴 ‘삼국지’다. 역사학자의 글답게 아주 냉정하게 쓰여 유비의 역사적 실체를 잘 알려주는 동시에 본받을 만한 영웅으로서 그 매력을 잘 짚어 보여준다. ‘삼국지’ 마니아들을 위한 좋은 길잡이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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