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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서평] 냉전(冷戰)의 대량파괴무기가 남긴 위험한 유산 _ 데드 핸드




데드 핸드 / 데이비드 E 호프만 지음, 유강은 옮김 / 미지북스


사실들은 아름답다. 정교하게 배치되고 긴박하게 응축된 채 사건의 배후를 향해 파고들어가는 강렬한 운동을 할 때, 우리는 사실의 내부로부터 어둠을 밝히는 환한 빛이 새어나오는 것 같다고 느낀다. “바람보다도 더 먼저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예지가 있을 터인데도,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라고 무심하고 단정하게 단어를 골라내는 현장 특유의 글쓰기가 또다시 빛을 얻었다. ‘워싱턴포스트’에서 스물일곱 해 동안 근무한 민완 기자답게 데이비드 호프만은, 사실을 끈질기게 집적하는 건조한 글쓰기로 차가운 전쟁(冷戰)의 뜨거운 역사(熱史)를 써내려 간다.

저자는 미소 양국 사이에 펼쳐진 파멸의 레이스, 즉 지도자의 한순간 실수만으로도 인류를 순식간에 완전한 무(無)의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죽음의 손’을 향한 경쟁을 극단적으로 세밀하게 추적한다. 핵무기를 비롯해 생물학무기 등 대량파괴무기를 향한 양국 지도부의 공포와 집착, 음모와 배신, 탐지와 은폐의 더러운 역사를 읽고 있자니 저절로 구역질이 솟아서 여러 번 토할 뻔했다. 여러 해 전 아우슈비츠에 갔을 때 느꼈던 절망적 기분과 비슷했다.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 신뢰가 통째로 증발하는 듯한 끔찍함.

특히 대한항공기 격추사건을 다룬 ‘전쟁 소동’ 장을 읽을 때에는 거대한 슬픔을 느꼈다. 고등학교 때 여의도광장에 집결해 ‘소련의 만행’을 규탄했던 날 쏟아졌던 빗줄기가 다시 가슴에 내리는 기분이었다. 역사에 농락당한 끝에 헛되이 사라진 생령들은 무슨 억울함이란 말인가.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미소 양국의 지도부는 핵 선제공격의 대상이 될 것을 두려워했고, 선제공격을 받은 후에 치명적인 파괴 상태에서도 보복공격을 통해 상대국가에 피해를 돌려줄 수 있을까를 염려했다. 심지어 오작동만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컴퓨터 자동보복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도 했다. 상대방의 핵미사일 공격을 감지할 육해공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매년 수천억 원의 자금이 들어갔으며, 그것도 부족해서 스파이를 파견해 치열한 물밑공작을 수행했다.

로널드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극동의 캄차카반도 부근에서 미국의 직접 첩보활동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정찰기를 보내 소련 영공을 근접비행하면서 핵공격 징후를 포착하려 한 것이다. 미국이 이용한 정찰기는 RC-135였는데, 보잉기와 형체가 상당히 비슷했다. 소련의 극동 쪽 현장 담당자들은 이미 그전에 한 차례 침입을 허용한 일로 크게 문책을 당한 상태였다. 이때 대한항공기 조종사들은 자동항법장치를 오조작함으로써 소련 영공에 침입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우연히 이날 RC-135 역시 작전을 수행했다. 소련의 낡은 레이더 시스템은 RC-135를 추적하다가 놓쳐버렸고, 그 항로에 방향을 잘못 잡은 대한항공기가 들어섰다. 결과는 민간 항공기에 대한 격추였다. 패닉 상태에 빠져 있던 소련군 지휘부는 제대로 확인하려 하지 않았고, 미사일 발사 단추를 누른 조종사 역시 의혹은 있지만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잦은 실수에도 인간은 결코 패배하지만은 않았다. 저자는 레이건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두 사람을 중심으로 대량파괴무기의 무분별한 폭주를 멈추려고 애썼던 이들의 이야기를 함께 펼쳐나간다. 외교관, 과학자, 군인 등 다양한 신분을 가진 그들은 시민사회 이곳저곳에서 자신의 양심으로 체제의 논리와 맞섰다. 이들의 분투가 있었기에 어쩌면 국가 단위로 진행된 대량파괴무기의 확산은 다소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도 무척 염려하듯이, 냉전 이후 대량파괴무기는 강대국 간의 문제가 아니라 ‘테러’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전쟁 도구로 쓰일 위협에 노출돼 있다. 일본에서 옴진리교가 일으킨 사린가스 살포 사건에서 알 수 있듯, 생물학무기는 소량만으로도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 소형핵무기가 실제로 사용됐을 때 일어날 결과는 상상하기조차 싫다. 

상대방을 공격해서 제거하려는 좀 더 효율적인 시스템을 개발해 봐야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최후의 파멸만을 앞당길 뿐이다.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채 서로를 이기려 해봐야 결과는 ‘상호확증자살’이 고작이다. ‘데스 핸드’가 샅샅이 추적해 보여준 냉전의 역사는 분명히 말한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같은 시스템이 안전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한순간에 한 지역의 모든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을 수 있는 대량파괴무기의 시대에는 삶의 안전을 보장하고 평화를 지속시키는 것은 오직 상호신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냉전의 와중에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렀다면, 이제 이 자명한 사실을 수용하는 지혜가 우리 안에 생겨나 있지 않을까.


지난주에 쓴 문화일보 서평입니다. 긴박감이 넘치는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다만, 아주 길었습니다. 한순간이면 끝장이 날 세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며, 이미 여러 번 위기를 맞이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