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에 한 번씩 《문화일보》에서 신간을 읽고 서평을 쓰고 있다. 빠르게 책을 읽고 이를 서평이라는 형태로 남기는 것은 여러 번 밝혔지만, 내게는 또 다른 즐거운 모험이다. 편집자 일을 하면서 습관적으로 책을 읽어 왔고, 또 기꺼이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책을 골라서 읽어 왔기에 읽기 자체는 그다지 모험이 아니다. 거기에 쓰기가 덧붙은 것은 아직 익숙지만은 않지만, 또 평생 늘 해 왔던 일이기도 하다. 지난 주에 읽은 책은 연세대 최연식 교수의 『조선의 지식계보학』(옥당, 2015)이다. 니체가 생성하고 푸코가 생각의 도구로 발전시킨 학문인 ‘계보학’을 이용해서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하서 김인후 등이 조선 최고의 지식인으로 손꼽히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한다. 말로 물어뜯고 위협하고 피로 얼룩져 서로를 죽고 죽이는 과정이 끔찍하고, 그만큼 생생하다. 그들의 학문이 가치 없다는 것이 아니다. 문묘에 종사되는 과정, 즉 하나의 지식을 온 후학들이 숭앙하고 추켜 세우는 과정은 권력의 작용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교과서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아래에 서평을 옮겨 적는다.
‘조선 최고 지식인’ 추대는 政爭의 산물
1517년(중종 12년).
서양사에서는 루터가 95조에 이르는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문에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된 격변의 해다. 중국에서는 포르투갈이 광둥(廣東)성으로 들어와 마카오 지역을 점령하고, 이슬람 지역에서는 아바스왕조가 멸망한 해다. 조선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레이 황의 표현을 빌리면, “1517, 중종 12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라고 부르면 좋을 해다. 이 책 ‘조선의 지식계보학’이 출판되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러했다.
책에 따르면, 8월에 작은 사건이 일어난다. 공자 사당인 문묘(文廟)에 갑자기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가 종사된다. “종묘가 왕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마련된 사당이라면 문묘는 지식인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사당이다.” 조선 지식인(선비)이 본받을 정신적 사표를 뽑는데 개국공신인 정도전, 하륜, 권근이 아니라 조선에 반대해 속절없이 목숨을 버린 정몽주가 들어선 것이다. 게다가 조선조 들어 최초로 종사되었다. 이 일대 사건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책은 ‘문묘 종사’라는 기나긴 사건을 추적함으로써 ‘정치동학’의 관점에서 조선 500년 역사를 한 줄로 꿴다. 조선 이전에 문묘에 종사된 이는 설총, 최치원, 안향 세 사람뿐이었다. 1398년(태조 7년) 문묘가 세워진 지 무려 120년에 이르도록 적절한 이가 없어 채우지 못하다가 정몽주가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으로 조선의 제삿밥을 먹게 되었다. 이 일을 주도한 것은 조선 유학의 중흥조로 불리는 조광조다.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한 후, 기의(起義)의 명분을 역사적으로 세우려고 애쓰던 반정 세력은 본래 연산군의 폭정에 희생된 스승 김종직 등을 문묘에 종사하려다 좌절한다.
이에 조광조는 방향을 돌려 정몽주를 “부당한 권력에 맞서서 희생된 지식인의 절의 정신(節義精神)을 치세의 상징이자 시대정신으로 부활”시키려 한다. 태종 때 이미 복권되었던 정몽주는 문묘 종사의 조건에 부합하는 데다 그 학문이 “길재, 김숙자, 김종직을 거쳐 김굉필과 조광조에게 계승되었다”는 도학의 계보를 명확하게 설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에 끝까지 반대했던 고려인 정몽주가 조선 사림의 계보에서 기원이자 으뜸이 되는 역사의 해프닝은 두 차례 사화를 겪고 폭정을 저지르는 왕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면서까지 조선의 본래 이념을 되살리려는 지식인들의 기나긴 투쟁에 따른 정치적 타협의 결과였던 것이다.
‘유교의 나라’ 조선은 이처럼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의) 폭정에 저항한 지식인의 가치를 공인받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정치투쟁의 산물”이었다. 문묘에 종사된 이들은 정몽주를 비롯하여 열다섯 명밖에 되지 않는다. 정몽주 이후 이들은 세 단계를 거쳐 문묘에 이름을 올리는데, 그때마다 정치 격변 속에서 지식인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끔찍한 일이 벌어져 죽백(竹帛)이 붉게 물들었다.
첫째 단계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종사를 둘러싸고 광해군 때 남인과 북인의 쟁투이다. 그 결과 남인이 승리해 북인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둘째 단계는 이이와 성혼의 종사를 둘러싼 남인과 서인의 투쟁이며, 이는 숙종 때에 이르러 세 차례 환국이 불러일으킨 피바람 속에서 남인의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퇴계와 율곡이라는 조선 지식 계보의 양대 산맥이 형성되었다. 셋째 단계는 ‘탕평(蕩平)’의 명분 아래 영조가 소론 박세채를, 정조가 호남 학맥 김인후를 거의 일방적으로 문묘에 종사하는 등 지식 권력 내부의 독립성이 억제되어 왕권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시기이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문묘 종사를 둘러싼 언로가 막히고 지식 권력의 자율성이 억제되자, 지식 권력의 내부 토론이 억제되면서 노론이 독주하여 비판 정신이 소실되었다.
저자는 “계보가 발생하는 순간에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망과 투쟁의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문묘 종사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나는 학문적 도통의 계보(당파)에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전제 군주의 주도로 이루어진 “탕평”을 비판 정신의 억제와 소멸로 해석한다. 지식인들의 진정한 토론이 살아 있을 때에만 공동체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을 믿는다면, 당쟁은 조선을 건강하게 하고 탕평은 조선을 병들게 했단 말인가. 이 주장은 조선에 대한 우리 상식을 파괴한다. 깊이 따져 볼 과제 하나가 생긴 셈이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은 세 번 건국되었다. 첫 번째는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가 말 위에서 휘두른 칼을 통해서, 두 번째는 관료제의 확립과 과전법 체제의 구축 등 정도전이 설계한 제도를 통해서, 세 번째는 지식인의 문묘 종사를 둘러싸고 전제 군주와의 투쟁 끝에 이루어진 지식 권력의 확립을 통해서. 모든 혁명은 이렇듯 무력, 제도, 정신의 세 가지 요소를 갖춘 이후에야 비로소 성공을 운위할 수 있는 법이다. 이 책 이후 1517년은 달리 불려야 할 것이다.
“1517, 중종 12년, 조선이 건국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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