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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몽테뉴의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_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을 읽다 (2)



연이틀 슈테판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안인희 옮김, 유유, 2012)을 읽었다. 아침에 시내에 나갈 일이 있어서 지하철에서 어제 읽다 아껴 둔 부분을 마저 끝냈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츠바이크의 글은 한 위대한 정신에 대한 지극한 공명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소리굽쇠의 한 축이 되어 저자의 삶이나 글과 부딪힐 때마다 울음소리를 낸다. 역사적 인물의 복원이 아니라 ‘위대한 현재’를 발굴하는 광부의 솜씨를 가지고 있다. 기이하고 훌륭하고 본받고 싶은 글이다. 

서른여섯 살, 아버지가 죽자 유산을 물려받은 몽테뉴는 비로소 홀로 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관심을 둔 것은 영지의 경영이 아니었다. 몽테뉴는 세상에서 물러나 성 안에 있는 작은 성인 ‘치타델레(Zitadelle)’에 서재를 꾸미고 그 안에 틀어박혀 오직 자신에게 침잠하는 길을 택했다. 서재 들보에는 54가지 격언을 새겼는데,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었으나 마지막 격언만 프랑스어로 적혀 있었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

이로부터 질문의 형식으로 제출된 내면이 몽테뉴가 추구하는 온전한 삶이 되었다. 아무것도 단정하지 않고,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은 채 오로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무한한 개인적 탐구심으로 무장한 사유, 그러니까 “자기 자신 말고는 다른 누구도 섬기지 않”는 사람이 탄생했으며, 이로부터 ‘에세이’라는 특이한 글쓰기 형식이 창조되었다. 시대의 소음으로부터 비껴난 존재인 “내적인 자아, 아무도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자아”를 발명한 것이다.

책의 절정부를 이루는 ‘창작의 10년’과 ‘자아를 찾아서’는 따로 떼어서 반복해서 읽고 싶을 만큼 통찰력이 넘친다. ‘창작의 10년’은 “생각하는 인간에게 찾아오는 가장 아름다운 행운은 탐구할 수 있는 것을 탐구하고, 탐구할 수 없는 것을 조용히 숭배하는 일이다.”라는 괴테의 말을 제사로 걸어놓고 시작한다. 학교라는 청춘의 감옥에서 탈출할 때 그를 이끌었던 것이 독서였듯이, 자신이 마련한 ‘홀로 됨’의 공간 속에서 중년의 영주인 몽테뉴를 인도한 것 역시 독서였다. 몽테뉴는 말한다.


책이란 삶이라는 여행에 가져갈 수 있는 최고의 양식임을 깨달았다. 


책들이 나의 왕국이니, 나는 이곳에서 절대군주가 되어 지배하련다.


나는 책에서 만나는 난관 때문에 손톱을 물어뜯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두 번 노력해 본 다음 그것을 포기한다. 내 정신이 도약을 하면 되니까. 첫눈에 어떤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면 노력을 거듭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봤자 점점 더 모호해질 뿐이다.


[책은] 내 판단력이 기억을 동원하여 일하게 해 준다.


츠바이크에 따르면, 몽테뉴의 독서는 자기 자신을 이룩하는 방식으로, 상호 대화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몽테뉴는 책에서 어떤 생각도 강요받지 않으려 했고, 그럴 위험이 있을 때에는 책을 덮어버렸다. 그는 억지로 공부를 해서 학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고, 오직 순수한 즐거움 속에서 서로 묻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책을 읽었다. 그래서 몽테뉴의 독서는 즐거울 수 있었고, 『에세이』는 자주 독서 에세이인 동시에 자유 연상이기도 했다. 책에서 나온 구절과 몽테뉴 자신의 사유가 구분 없이 뒤섞인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다. 그에게 독서는 “연필을 손에 잡고 하는 대화”였다.

문학이 아닌 영역에서도 몽테뉴에게는 마찬가지 태도를 견지했다. 역사 자체가 아니라,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내적 대화를 촉발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가 좋아한 것은 잘 쓴 전기였다.


전기를 쓰는 역사가들은 (중략) 사건보다는 그 동기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겉으로 일어난 일보다 속에서 나온 것을 더욱 중히 여긴다.


반대로 그는 어설픈 역사가들, “고기를 미리 씹어서 우리에게 주고, 역사에 대해 스스로 판결하고, 역사를 자기들의 선입견에 따라 왜곡”하는 자들을 혐오했다. 몽테뉴가 사랑한 것은 “우리를 인간적인 것으로 이끌고 인간적인 것을 이해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다음에 갑자기 기록이 나타난다. 치타델레의 서재를 통해 이룩한 내적 침잠 속에서 책이 건네는 질문에 홀로 묻고 답하면서 떠오른 단어들이 손목을 움직여 노트를 채워간다. 진정 자유로운 글쓰기였다. 생각나는 대로, 독창성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리낌 없이, 몽테뉴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간다.


그 어떤 확고한 목적도 없는 지성이 길을 잃었다. 아무 데로나 가려는 자는 그 어느 곳에도 가지 못하는 법. 그 어떤 항구도 목적지로 삼지 않은 사람에게 바람은 아무 쓸모가 없다.


무목적의 글쓰기, 유목적 글쓰기인 에세이는 이렇게 탄생했다. 어디론가 가기 위한 글쓰기,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거나 모범이 되지 않는 글쓰기였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자유의 글쓰기였다. 몽테뉴는 말한다.


나는 책을 쓰는 저자가 아니다. 내 과제는 내 삶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은 자기가 저 자신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츠바이크에 따르면, 몽테뉴는 모든 것에서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모든 것을 찾는 인간이었다. 그는 호기심을 품고 이리저리 돌아다닐 뿐이지 어디에도 이르지 않으려 했다. “그 무엇도 대담하게 주장하지 않고, 그 무엇도 경박하게 부인하지 않았다.” 따라서 몽테뉴에겐 어떤 길도 잘못되지 않고 모든 길이 ‘올바른’ 길이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자아에 형태를 부여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나쁜 일은 나쁜 대로, 자아에 성찰의 기회를 부여하는 법이다. 몽테뉴는 세상이 아니라 자신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오직 너희 자신과만 결합”하라고 우리에게도 권한다. “나는 늘 나 자신을 향해 다가간다.”라고 말한다. 바깥이 내면에 일으키는 공명만이 오직 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일단 출판이 되고, 이름을 얻자 몽테뉴의 글쓰기는 조금씩 달라진다. 자유의 형식은 여전히 유지하되, 즉 자신에 대한 견고한 관심을 굳히면서 동시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를 염려하는 형식으로 끈질기게 수정을 되풀이하는 몽테뉴가 나타난다. 이에 대한 츠바이크의 서술은 지극히 날카롭다.


모든 공공성은 거울이다. 인간은 자신이 관찰당한다는 것을 알면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중략) 가장 지혜로운 사람조차 유혹을 피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자신을 알고자 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출판이란 영혼을 타락시키는 악마의 행위란 말인가. 이에 대한 츠바이크의 대답은 편집자로서 나에게 지극한 위안을 준다. 문필이란 무엇인가, 글쓰기란 어떤 일인가를 고민하려는 사람이 한번쯤 읽어볼 만한 구절이다.


“나는 삶을 사랑하고, 신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그대로 삶을 이용한다.” 그가 자신의 자아를 보살피는 일이 그를 세상에서 격리시키거나 고독하게 만들지 않았고, 오히려 수많은 친구들을 만들어 주었다. 자신의 삶을 서술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것이며, 자신의 시대를 표현한 사람은 모든 시대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