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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글쓰기에 대하여(헤르만 헤세)

작가들에게 글쓰기란 언제나 멋지고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것은 일엽편주에 이야기 한 편을 싣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것 혹은 우주 속에서 홀로 비행하는 것에 비견된다. 적절한 단 어 하나를 찾아내고 가능한 말 세 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짓고 있는 문장 전체를 감정과 귀에서 잃지 않는 것, 문장을 다듬고 자신이 선택한 구성 방식을 실현하고 구조물의 나사를 조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장 전체 혹은 책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부단히 감정 속에 현전시키는 것. 이 모든 것은 매우 흥미로운 활동이다. ―헤세





올해 열여덟 번째 책은 폴커 미켈스가 편집한 헤르만 헤세의 『화가 헤세』(박민수 옮김, 이레, 2005)이다. 헤세는 문학자로서만이 아니라 화가로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 책은 그림에 대해서 쓴 헤세의 이런저런 글들을 모은 에세이집으로 그림에 대한 헤세의 순수한 열정을 보여 준다. 

헤세에게 그림은 무엇보다도 삶의 상처로부터 생동감을 회복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또한 조용한 시골 마을에 은둔해서 자신을 관조하여 인생을 긍정하려는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헤세는 “현실은, 이 초라한 현실은 언제나 실망스럽고 황량하기만 하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을 변화시키려면 현실을 거부하는 길밖에, 우리가 현실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길밖에 없다.”라고 말하는데, 이 길은 문학과 그림 두 갈래로 나타난다. 

절판된 것이 아쉽지만, 이 책에서 우리는 “가혹하기 그지없는 시대에서 삶을 견뎌” 내려는 한 위대한 인간의 꾸밈없는 초상을 마주치는 기쁨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 이 책에서 마주친 몇몇 구절들을 옮겨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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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훌륭한 화가는 아니다. 나는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계절마다, 날마다 그리고 시간마다 변하는 이 골짜기의 모습, 저 평지의 굴곡과 호숫가의 형태와 풀밭 사이의 구불구불한 강을 나만큼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열정이란 아름다운 것이고, 종종 젊은이들과 놀랍도록 잘 어울린다. 그러나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는 유머가 더 적절하다. 그들에게는 미소, 지나치게 진지하지 않은 태도, 세계를 하나의 그림처럼 보는 마음가짐, 사물들을 저녁 구름의 무상한 유희처럼 바라보는 자세가 더 어울린다.


누구나 마음속에 무언가는 있고, 누구에게나 말할 무엇이 있다. 그러나 침묵하거나 더듬거리지 않고, 말로든, 색채로든, 음조로든 그것을 정말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다! 아이헨도르프는 위대한 사상가가 아니었다. 르누아르도 대단히 심오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많든 적든 말해야 할 것이 있었고, 그것을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중략) 틀어박혀 연습을 계속하는 것, 뭔가 할 수 있을 때까지, 뭔가 이룰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되풀이하는 길도 있으리라. 나는 배낭을 꾸리면서 두 번째 길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얻은 깨달음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세상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조용히 주의 깊게 관찰하기만 한다면 세상은 성공한 사람들이나 세상의 인기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것을 보여 준다는 사실이다. 관조 능력은 탁월한 기술이다. 그것은 치유와 즐거움을 마련해 주는 세련된 기술이다. 


사실 가장 무상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죽는다는 것 자체는 아름답고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좋은 책들은 멸종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새 책을 읽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결심하지만, 출판사가 보낸 책들 중에 경탄을 자아내는 것들이 있어서 내 결심을 꺾어 버린다. 필요 없는 책 수백 권을 치워 버린 지금도 정말 훌륭한 책들, 내가 사랑하고 아무래도 곁에 두고 싶은 책들이 다수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책들을 삐걱거리는 책장에 억지로 끼워 넣는다. 


현실이란 우리가 가장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무엇이다. 왜냐하면 현실은 늘 존재하고 번거롭기 마련인 것이며 더 아름답고 더 필요한 것들이 우리 주의와 배려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현실이란 그 어떤 경우에도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며, 그 어떤 경우에도 섬기고 숭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럴 것이 현실은 우연일 뿐이고 삶에 대한 배반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이 초라한 현실은 언제나 실망스럽고 황량하기만 하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을 변화시키려면 현실을 거부하는 길밖에, 우리가 현실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길밖에 없다.


내게 그림 그리기는 가혹하기 그지없는 시대에서 삶을 견뎌 내고 문학으로부터 거리를 취할 수 있는 출구입니다. 


작가들에게 글쓰기란 언제나 멋지고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것은 일엽편주에 이야기 한 편을 싣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것 혹은 우주 속에서 홀로 비행하는 것에 비견된다. 적절한 단 어 하나를 찾아내고 가능한 말 세 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짓고 있는 문장 전체를 감정과 귀에서 잃지 않는 것, 문장을 다듬고 자신이 선택한 구성 방식을 실현하고 구조물의 나사를 조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장 전체 혹은 책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부단히 감정 속에 현전시키는 것. 이 모든 것은 매우 흥미로운 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