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세계 출판의 상황에 대해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과 대답, 그러니까 공부가 필요하다. 과거의 경험만으로는 쉽게 추론하거나 예견하기 어려운 낯선 상황이 계속되는 중이다. 서점 기능의 지속적 약화, 출판 공론장의 구조적 붕괴, 이형 콘텐츠와의 출혈적 경쟁, 출판 자본의 단기 투기 자본화 등 거시적 요인들이 개별 출판 또는 서적이 쓰이고 만들어지고 팔리는 미시적 현장을 옥죄는 중이다. 두 달 앞으로 다가온 도서 정가제의 제한적 시행은 온라인 서점 등장 이전으로 출판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에는 조금의 도움이 되겠지만, 이런 복합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는 데에는 별다른 시사점이 있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낡은 절망이 아니라 어쩌면 새로운 분투를 불러일으킨다. 서점의 약화는 우리가 서점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하는 동시에 책과 인간이 만나는 새로운 장소들을 발굴하려는 탐험의 열정을 일깨운다. 출판 공론장의 붕괴는 기존 공론장의 재활성화를 위한 지속적 논의와 함께 ‘소설리스트’와 같이 새로운 공론장을 구축하려는 헌신적 열망을 불태우게 한다. 이형 콘텐츠와의 경쟁은 책의 본질에 대한 오랜 성찰을 내려놓지 않으면서도 전자책이나 앱과 같이 책과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접합을 통해 책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운동을 만들어 낸다. 출판 자본의 투기화는 기존 출판 형태의 혁신적 재구축을 요청하는 한편으로 ‘나눔문화’가 보여 준 것처럼 출판 자본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출판 형식이 존재할 수 있음을 고민하게 한다.
느린 미디어로서 책은 충분한 성찰의 시간 없이 결코 태어날 수 없다.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등 온라인 미디어와 달리 ‘나’의 관심사와 문제에 직접 연결되지 않고 ‘우리’라는 공동의 관심사와 문제에 집중한다. ‘나’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공공화하고, 순간의 문제를 영원의 지혜로 승화하는 것이 본디부터 출판의 역할이다. 오늘날 책은 단기 생산, 단기 유통, 단기 소비라는 속도의 이데올로기에 짓눌려 파랗게 질려 가고 있다. 그러나 책의 모험은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다. 누군가, 어딘가에서 깃발을 들어 올려서 책의 낯선 영토를 새롭게 선포하는 중이다. 편집은 어디까지나 여기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창조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책의 인간들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책들이 나고 만들어지고 읽히는 지점들을 발명하는 행위를.
홍동밝맑도서관에서 첫날을 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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