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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만드는 일

편집자는 고백해야 하는가?


요즘 출판계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본격 출판 팟캐스트 [뫼비우스의 띠지]의 첫 번째 방송 제목은 ‘사장님의 SNS’였다. 여기에 이른바 출판의 소셜화에 대한 고통스러운 유머가 있고, 신랄한 자기 긍정이 있으며, 변화에 대한 슬픈 응시가 있다. 

출판이란 본질적으로 소통에 대한 것이고, 책은 그것을 위한 도구 중 하나이므로, 편집자나 영업자가 저자 또는 독자가 만나는 장을 열어 소통을 증진하는 것은 어쩌면 차라리 의무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왜 이 행위 앞에 고통, 신랄, 슬픔과 같은 수식어를 붙여야 하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이곳에서 길 잃게 한 것일까.

편집자는 고백해야 하는가? 이 낯선, 그러나 신선한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찾지 못했다. 소셜이 가져온 저비용 고효율의 마케팅은 말 그대로 저비용 고효율인데도, 그러니까 모두가 환영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를 그토록이나 끈질기게 괴롭히는가? 

나는 오랫동안 질문을 머릿속에서 굴려 왔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실무적으로 답하고 싶지 않았고, 운명적으로, 그러니까 철학적으로 답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청소를 하다가 하나의 그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물론 대답은 아니었다. 움직임 속에서 잠시 멈춘 상태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글은, 다음 번에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를 때까지 잠재태로서, 미래를 촉발하는 형태로서 존재할 것이다. 그뿐이다. 더는 아니다.





현대 사회에 대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통찰력은 오늘날 편집자가 자기의 일을 성찰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준다. 특히 『부수적 피해』(정일준 옮김, 민음사, 2013)의 6장 「프라이버시의 위기와 인간 유대」는 저자의 그림자 속에 있으면서 책의 내성(內性)을 오로지 책임져야 했던 편집자의 기본 임무가 해체되어 가는, 그리하여 편집자를 조증 환자처럼 온갖 곳에서 약을 팔도록 강제하는 현재의 조류에 대한 어떤 음미할 만한 성찰을 가져다 준다. 바우만은 말한다.


고백 사회의 도래는 가장 현대적인 창안물인 프라이버시의 궁극적 승리를 알리는 것이었지만, 그 영광의 정점에서 어지럽게 추락하기 시작함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프라이버시가 공적 영역을 침략하고 정보하고 식민화했지만, 그것은 프라이버시의 자율성, 규정된 특성, 그리고 아끼고 보호받을 특권을 잃으면서 얻은 것이었다. (130쪽)


바우만에 따르면, 이건 유동적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기본 현실 조건이다. 지역과 성과 계급에 의해 제약받았던 정체성에서 해방되자마자, 그리하여 지역에서 세계로 스스로를 해방하자마자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정의에 해당하는 '공적 영역'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진보이고, 근대 자체의 본질이다.

해방되기 위해서는 소속될 수 없고, 소속되지 않으려면 어떤 공적 영역도 프라이버시 속으로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프라이버시의 독재가 진행되면서, 이번에는 오히려 프라이버시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우리는 감시받고 간섭받지 않는 어떤 고유한 주권적 공간을 마련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로 인해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는 것이다. 아무도 내게 프라이버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지 않을까 하는 불안 말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아무도 모를 프라이버시가 있음을 알리기 위한 적극성, 타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서둘러 자신의 사적 영역을 고백하고 공개하는 적극성이 생겨난다. 

그리하여 새로운 공적 영역이 도래한다. 개인의 사적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사적 영역을 고백하기 쉬운, 그러니까 공유하기 쉬운 공적 영역 말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소셜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런 것들이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을 억압하고 침범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을 공격하고 식민화함으로써 진정한 상호성(소통과 구속이 동시에 나타나는)이 작동해야 할지도 모르는 영역들을 부재자로 만드는 것이다. 

바우만을 역설적으로 읽는다면,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편집자는 고백할 수밖에 없다. 고백은 이제 개인의, 기업의, 사회의, 국가의 무기이다. 그것도 다른 모든 수단을 무력화하는,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쏘아 대는 핵무기이다. 단 두 차례의 사용으로 영원히 사용이 금지되어 버린(그러기를 바라는) 진짜 핵무기와는 달리, 이 무기는 언제든지 사용 가능하며 그로써 공적인 모든 것을 거의 파괴한다. 소통은 하지만 구속은 없는 의사 공공성이, 소통도 하고 구속도 하는 공공성을 덮어 버리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공적 영역은 자신의 메시지를 모두에게 전달하는 데 상당히 허약하다. 방송과 신문과 인터넷과 다른 모든 순식간에, 거의 모든 이들에게 도달할 수 있는 발달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있는 데도 그렇다. 황제의 조칙이 전달되고 인지되는 것과 대통령의 신년사가 전달되고 인지되는 것을 비교해 보면, 현대의 이런 어이없는 패배는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다. 

책이 공공재에 속한다면, 정확하게 말하면 물리적 책이 아니라 물리적 책 안에 담겨 있는 콘텐츠가 공적 영역에 속한다면, 그것이 출판의 이념형이라면, 책은 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공적 메시지를 담고 있더라도, 원칙적으로 다수에게 발견될 수 없다. 어쩌면 만족할 만큼의 소수에게 발견되는 것도 절대로 쉽지 않다.(서점의 약화 때문에 위탁 배본에 의한 발견이라는 출판의 기본 공식이 급속히 파괴되어 가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것은 더욱더 심각하다.) 오늘날 공적 영역은 사적 영역의 파이프 라인을 통과하지 않고는 거의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가 작품을 썼다는 것을 그 자체로 전달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사적 영역의 파이프 라인을 쉽게 통과할 수 있도록, 그것의 공적 성격을 약화해서 결다리 콘텐츠를 덧붙인다. 작가의 사생활이나 편집하면서 있었던 사소한 에피소드들을 까발리거나, 미니 북이나 양장 노트와 같은 이벤트 상품을 덧붙이고 영화 티켓을 끼워 주고 북콘서트 초대권을 만들거나, 때로는 편집자나 영업자가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한없이 관심 쇼핑이나 구절 품팔이에 나선다.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의 곁다리 콘텐츠를 소비하도록 유도한다. 책의 공공성이 아니라 책의 프라이버시를 소비하도록 만든다. 바꾸어 말하면, 저자와 편집자나 마케터가 사적 생활을 온통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트위터에서 페이스북에서 팟캐스트에서 북 콘서트에서 선물, 경품, 이벤트, 콘서트 등에 대해, 그리고 가끔은 책 그 자체에 대해 한없이 수다를 떨어 댐으로써 우리는 발견성(discoverability)의 증가라는 작은 승리를 얻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좋아졌을까? 실패 가능성은 정말로 줄어든 것일까? 이것이 출판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던 세계란 말인가? 우리가 SNS에 이토록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오직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곁다리텍스트는 언제나 텍스트 자체를 위협하고 흔들면서 텍스트의 해체와 재구축 운동을 만들어 낸다. 임태훈의 「파라텍스트 증식론」(『우애의 미디올로지』, 갈무리, 2012)이나 장유승의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글항아리, 2013)은 곁다리텍스트를 통해 텍스트를 둘러싼 예기치 못한 움직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래, 별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이게 텍스트를 구원할 유일한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개 고백을 통해서는 불행히도 공적 유대를 만들 수 없다. 사적 영역의 공개 고백은 오히려 그러한 유대가 전면적으로 파괴된 결과이다. 서로를 구속하는 친구가 있을 때, 우리는 이런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저자와 편집자와 독자가 공유하는 내밀한 공간이 있을 때, 우리는 다른 게 필요 없었다. 친구와, 친구의 친구와, 친구의 친구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의...... 이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때때로 그 친구들이 수십만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금세 줄어들어 언어의 미세한 차이와 표현의 사소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적당한 규모의 친구들만 남았다. 그때 우리는 고통스러웠지만 어쩌면 충분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라. 손가락을 걸고서 엄마랑 나랑만 아는 약속을 해야만 우리는 포근해지지 않았던가. 친구들과 부모들이 모르는 비밀 결사를 했을 때 뭔가 뿌듯하지 않았던가. 유대란 적정한 규모의 인간들만 아는 비밀을 서로 공유할 때 생긴다. 이럴 때에만 사랑과 동시에 구속도 함께 생기는 것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대량 공개 방식의 소셜 미디어에서는 이른바 '쿨한' 연대, 약한 친구밖에는 생겨나지 않는다. 바우만은 말한다.


인터넷 공동체는 '접속'하고 '접속을 끊는' 개인적 결정과 충동의 중첩에 의해 구성되고 해체되며, 확대되고 축소된다. 그러므로 인터넷 공동체는 현저하게 변하기 쉽고 취약하고 지독하게 분열적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유동적 현대의 환경에 던져진 그토록 많은 사람이 인터넷 공동체의 도래를 환영하고 '과거 유형'의 공통체보다 선호하는 정확한 이유이다. (중략) 현대의 유동적 생활 형태의 바탕이 되는 유동적 환경을 고려할 때, 인터넷 공동체가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인 까닭은 바로 그들의 영구적인 일시 상태, 영원히 잠정적인 임시성, 장기적인 참여나 완전한 충성과 엄격한 규율에 대한 자제 때문이다. (141쪽)


그래서 출판이 온라인 공동체에 대부분의 노력을 집중하는 것은, 저자와 편집자에게 끊임없이 공개 고백을 강요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효율적일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자살 행위에 가깝다. 만약에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계속 메뉴를 개편하고 인테리어를 단장하면서 고객이 싫증내지 않도록 끝없이 노력해야 하는 트렌드 거리의 트렌드 카페 사업자처럼 일하게 될 것이다. 영구적인 일시 상태나 영원히 잠정적인 임시성을 얻기 위해서. 이것이 우리가 정말로 바라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란 말인가. 

물론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 나아가서 이렇게 물어보자. 편집자라면 어떻게 살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제출하는 대신 최근에 감동적으로 읽은 책의 한 구절을 먼저 소개하고 싶다. 후지타 쇼조의 『정신사적 고찰』(조성은 옮김, 돌베개, 2013)의 첫머리에 나온다. 


골목길은 집의 내부와 출입구를 경계 삼아 바로 연속해 있는 친근한 밖의 세계이며, 사람들이 다목적으로 사용하는 공동의 공간이다. 그것은 관공서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곳에서 관계한다는 의미에서 공공 공간이다. (9쪽)


후지타가 고찰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일본의) 현대 자체이다. 현상이 아니라 정신으로서의 현대이다. 현상 너머에 있는 정신의 움직임이 그의 관심사이다. 요즘 이 책에 푹 빠져 있다. 골목길에서 벌이는 숨바꼭질 놀이의 인류학적 기원과 그 의미를 성찰해 가면서 후지타는 현대가 파괴해 버린 개인적 삶과 겹쳐져 있는 어떤 사회적 영토를 되살리려 한다. 그것은 흔들면 눈 내리는 풍경이 나타나는 유리구슬 장난감을 통해, 그것에 겹쳐져 있는 개인적 기억을 통해 콘크리트로 뒤덮인 황폐한 근대 사회를 초월하려 했던 벤야민적 영토이기도 하다.

출판은 약한 유대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저자들과 독자들을 위한 굳건한 사회적 영토를 확보해야 한다. 일시적이고 임시적이며 잠정적인 공간을 넘어서는 이런 영토는 다만 소셜 미디어 속의 고백으로는 도저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과거에 모아 두었던 회원 DB 속의 이메일 주소가 대부분 작동하지 않듯이 현재 우리가 모아 둔 이른바 회원 수 역시 어떤 의미도 없어질 날이, 갑자기, 도둑처럼 도래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골목은 어디이고, 우리의 숨바꼭질은 또 무엇인가?

얼마 전까지 우리의 골목은 서점이었고, 우리의 숨바꼭질은 책이었다. 고형적인 것인 제품(Product)과 장소(Place)가 유동적인 것인 가격(Price)과 프로모션(Promotion)에 밀려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제품과 장소를 저자 및 독자와 이어주던 신문이나 잡지 같은 공론장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지금, 어쩌면  이 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정녕 요원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 출판 100년의 역사가 가장 확실하게 증명한 것은 닥쳐오는 어떤 문제든,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처음 물음으로 돌아가자. 편집자는 고백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백이 책을 알리는 데 효율이 높아서가 아니라 고백 없이는 친구를 만들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잠시 유보해 두고 싶다. 사회적 삶과 사적 삶이 교차하는 골목길과 숨바꼭질의 세계를 복원하지 않으면, 출판이 진정으로 살아 남는 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사회적-사적 영토를 발견하고 개척하지 않는 한, 우리의 방황은 끝없을 것이고, 우리의 일은 영원히 불안정성 속에 놓일 것이다. 그러니 이제 고백 자체를 성찰하고, 책을 위한 영토를 점거하자. 소셜이 아니라 영토다. 지금으로서는 이것만 분명히 해 두고 싶다. 여기가 출발점이다.


ps. 『부수적 피해』와 같은 시기에 쓰인, 어찌 보면 『부수적 피해』의 곁다리텍스트이자 어찌 보면 원 텍스트이기도 한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이택광, 박성훈 옮김, 자음과모음, 2013)는 고백에 대한 바우만식 대답이기도 하다. 이 진지한 사회학자는 일기조차 칼럼처럼 썼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기이면서 일기가 아니고 칼럼이면서 칼럼이 아닌, 독특한 텍스트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고백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백이다. 바우만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출판의 새로운 영토도 그런 종류의 고백 속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게 앞으로 내가 깊이 있게 탐구해 볼 만한 것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