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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만드는 일

출판과 편집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


이계원, Allotropism(同質異形) Acrylic on canvas & wood 172 x 122cm, 2003


연말에 며칠 쉬면서 책과 출판과 글과, 무엇보다도 삶에 대해서 이런저런 궁리를 해 보았다. 

자기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다. 내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끈질기게 나를 물고 늘어졌다. 망오십을 앞둔 삶이 갑자기 부닥치게 되는 답답한 공포라고 해야 할까? 새해를 앞둔 그저그런 의례적 공포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 시간 속에서 하릴없이 끙끙거렸다. 

그 와중에 틈틈이 내년에 나올 번역서의 교정을 보고, 또 밀렸던 책과 원고를 읽었다.

편집자 생활 20주년 기념 스페인 여행 때 내가 내렸던 답은 '읽기'였다. 내 삶의 대부분이 '읽기'로부터 나왔으니 결국 그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사적 삶의 결심과 공적 인생의 사업이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일까? 

때마침 새해 회사 신년회에서 발표할 자료를 만들면서 이런 질문을 가볍게 다루어볼 수 있었다. 

교재나 잡지 출판을 제외한다면, 근대 출판의 두 가지 형식은 결국 문고와 총서로 요약할 수 있다. 문고나 총서는 하나의 형식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출판의 본질형, 그러니까 랑그에 해당한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파롤을 고민해 보는 것, 출판의 변형 생성 같은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따져 보는 것이 출판을 엿보는 한 출발점은 아닐까? 강상중의 말처럼 우리는 미래를 바라봐서는 제대로 살 수 없고, 과거를 바라볼 때에만 제대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송태욱 옮김, 사계절, 2012)는 작년에 읽은 책 중 백미에 해당한다. 무서운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아래 문장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인생이란 "인생 쪽에서 던져오는 다양한 물음"에 대해 "내가 하나하나 답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중략) 인생이 물어오는 것에 대해 계속 대답해 간 사람만이 가혹한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반대로 도중에 대답하는 것을 그만둔 많은 사람들은 삶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물음에 '대답한다'는 것은 '응답하는' 것이고, '결단하는' 것이며 또 '책임을 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중략) 우리의 인생은 바로 그 인생에서 나오는 물음에 하나하나 응답해 가는 것이고, 행복이라는 것은 그것에 다 답했을 때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목적으로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즉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185~186, 190쪽)


어찌 보면 물음에 이르는 것이 인생이다. 물음에 이르면 도망치지 않는 한 어떻게든 답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모든 소중한 것은 어쩌면 다 이런 구조로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편집자라면 저 문장에서 '인생'의 자리에 '출판'이나 '책'을 집어넣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말일 날, 출판마케팅연구소의 편집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2월에 15주년을 맞이해 기념으로 한국의 출판 기획자들에 대한 책을 준비하는데, 그 책을 위한 좌담에 나와 달라는 것이다. 출판마케팅연구소 일은 아무리 바빠도 거절하기 어렵다. 출판계에서 《기회회의》의 거의 유일무이한 그 공론적 기능을 생각하면, 아내 몰래 보리쌀 서 말을 내다 팔아서라도 일단 돕고 볼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에 나가서 무슨 말을 이제 새롭게 덧붙일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그저 아득할 뿐이다. 

게다가 최근에 나는 출판계에서 '기획'이라는 말이 이제는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 많아졌다고 생각하는 쪽에 속하게 되었다. 나는 기획이라는 말이 출판 행위를 대표하는 것을 거부하고, 책이 한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 역시 혐오한다. 때때로 생각의 번개가 개인의 내면에서 떠올라 세계의 어둠을 가르는 적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일은 필자, 독자, 동료 들과의 한없는 대화와 공들인 협업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내가 일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어떤 과정이 일하는 것이다. 굳이 저자의 죽음까지 떠올리지 않더라도, 또 저자나 편집자의 개성이 책의 중요한 한 본질임을 절대로 망각해서는 안 되지만 출판은 어쩌면 이렇게 개인의 주체성을 가능한 한 박탈함으로써 정말 잘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좌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득 나는 며칠 동안 앓았던 질문들을 다시 깊이 떠올려 버렸다. 지난달 초, 회사 워크숍을 준비하면서 떠올렸던 질문들이, 아니 스페인의 지중해 바닷가에서 다듬었던 질문들이 내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고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책이란 무엇인가? 편집이란 무엇인가? 쓴다는 것, 읽는다는 것,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계속해서 진지하게, 출판이 던져 오는 이런 본질적 질문들에 대해서 답해야 한다. "삶에서 탈락하지 않으려면" 고개를 절대로 돌리지 않고 칠흑의 어둠 속에서 불쑥 던져지는 이 질문들에 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편집자의 삶이다.

아래에 작은 질문들을 남겨 둔 것은, 이 질문들이 정말 중요해서가 아니라 우리 노동의 본질을 쥐고 흔드는 위와 같은 큰 질문들에는 그저 살아갈 수 있을 뿐 글로써는 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최근에 내가 계속 쥐고서 답을 달아 보고 싶은 질문들이다. 두서 없이 생각나는 대로 노트에 적어 놓고 되묻는 것들인데, 좌담을 앞두고 일단 여기에서 먼저 공유해 본다. 


- 환경에 대하여

출판은 성장하고 있는가, 축소되고 있는가? 성장할 수는 없는가? 그 방안은 무엇인가?

시장 자체의 축소는 일시적인가, 운명인가? 이것은 대응할 수 있는 것인가? 

시장 축소에 출판의 책임은 없는가? 도서정가제는 그 대안일 수 있는가? 어떻게 할 것인가? 

출판 공론장의 축소, 서점의 쇠퇴, 비독서 중심 교육 등 발견성 약화에 대응할 수 있는가? 대응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북클럽, 강연, 블로그, 소셜 미디어, 팟 캐스트, 학교 마케팅 등은 발견성의 대안인가? 대안이라면 이 일은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과연 출판인가?

책은 20대에게 왜 매력적인 상품이 아닌가? 매력적일 수 있는가? 그 대책은 무엇인가? 아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전자책은 미래 출판의 모습인가? 그 모습은 현재 출판과 비슷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모습을 띨 것인가? 그러한 진단은 단기-중기-장기에 모두 적용할 수 있는가? 다르게 적용해야 하는가?

가격은 출판의 핵심 전략이 될 수 있는가? 제품력을 높이는 것(편집, 디자인 등)으로 가격을 이길 수 있는가? 


- 업에 대하여

저자에게 출판은 사업인가, 아니면 하나의 기능인가? 편집자에게는 무엇인가?

독자가 사는 것은 콘텐츠인가, 물건인가, 서비스인가?

출판이 저자에게 제공하는 가치는 도대체 무엇인가?

물성이 우리 업의 본질인가, 읽기가 우리 업의 본질인가? 이는 분리될 수 있는가? 분리된다면 다른 사업 모델이 있을 수 있는가?

편집 전략의 핵심을 개별 책의 발굴에 둘 것인가, 아니면 다양한 사업의 구축에 둘 것인가? 

출판은 OSMU로 전환해야 하는가? 전환할 수 있는가? 그때도 출판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저자 발굴 및 유지 시스템을 손볼 필요는 없는가? 서점 없는 출판이나 출판사 없는 출판 등 새로운 출판 모델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럴 때도 출판이라고 할 수 있는가?

출판은 수직 통합적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조직과 활동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출판에서 장기적, 안정적 성장은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지 않다면 출판 조직의 최적화된 모습은 무엇인가? 

출판사는 직원들과 장기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가?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그럴 때 출판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직원들은 왜 질문하지 않고 출판사는 답하지 않는가?

책은 도대체 장기 상품인가, 초단타 상품인가? 

문고본 등 저작권을 재판매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시장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