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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만드는 일

내면의 어둠과 사회의 어둠 ― 무라카미 하루키 풍월당 강연회에서

내면의 어둠과 사회의 어둠 

― 무라카미 하루키 풍월당 강연회에서


때때로 아무런 준비 없이 사람들 앞에서 짤막한 연설을 할 때가 있다. 본래 성격이 수줍어하는 편이라서 이럴 때는 정말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억지로 생각을 짜내고 심장 고동을 억누르면서 더듬더듬 한마디 보태는데, 대개는 횡설수설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지난 8월 2일 풍월당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과 음악’이라는 주제로 강연회가 열렸다. 풍월당 주인 박종호 선생의 진행으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민음사, 2013)에 나온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라자르 베르만 연주)를 감상하는 자리였다. 독자 100여 명과 함께 번역자인 양억관 선생을 모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나와서 한마디 하라는 말을 들었다. 시종일관 진지한 자리여서 평소 이 작품에 대해 생각하던 바를 짧게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오늘 불현듯 누군가 민음사 페이스북에 올라 있는 사진을 링크해 보내 주었다.

장은수(풍월당에서)

풍월당의 강연회가 흔히 그러하듯이, 이 강연회는 문학과 음악이 서로 공명하면서 잘 어우러져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데가 있었다. 박종호 선생의 진행 솜씨는 매끄러웠고, 양억관 선생의 발언은 하루키 신작의 문학적 핵심을 분석적으로 차분히 잘 드러내 주었다. 이 강연회의 내용이 따로 보고된 바가 없는 것은 두고두고 아쉬웠는데, 벌써 2주가 훌쩍 넘은 지금에 와서는 따로 기록을 남기기엔 이미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날 내가 한 말은 몇 마디 생각나는 바가 있어서 부족하나마 기억에 의존하여 여기에 살짝 적어 둔다.(올리면서 조금 보충했다.)


저는 지난 이십 년 동안 책을 만들어 왔고, 수많은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왔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한테 들려드리고 싶은 것은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입니다. 감히 함부로 재단하기는 어려우나, 제 경험에 비추어볼 때, 작가는 자기 영혼의 어둠을 응시하는 사람입니다. 

풍월당은 음악을 즐기는 곳이니까 음악을 빌려 이야기한다면, 우리 영혼에는 고유한 음색이 있습니다. 이 음색은 일상의 자질구레한 소음 속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저는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마음의 귀를 향해 끊임없이 신호 같은 것이 울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신호에는 각각 고유한 주파수가 있어서 타인들은 절대로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작가들은 이 주파수에 감염된 사람들, 그래서 그 주파수의 진동에 맞추어 온몸으로 떨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신호가 울리는 곳은 영혼의 표면이 아닙니다. 영혼의 이면, 빛이 닿지 않는 곳, 밑 모를 심연입니다. 심연은 고독합니다. 심연은 공포입니다. 심연은 어둡습니다. 누군가 심연에서 나오는, 내면의 어둠을 정직하게 응시할 때,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신호에 온 감각으로 반응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사람을 작가라고 부릅니다. 

영혼의 음색, 영혼의 주파수를 언어로 번역하는 것, (아, 소리로 번역하면 음악가가 되겠군요.) 그것이 바로 작가의 화법이고 문체입니다. 영혼 전체를 걸고 저마다의 고유한 화법을 돛단 채 언어의 바다 속을 굳세게 밀고 가는 것이 바로 작가의 임무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고독하고 불행합니다. 모두의 언어 속에서 혼자만의 언어를 쓰는 탓에 작가는 흔히 버려지고 이해받지 못합니다. 

작가는 자기 내면의 어둠을 응시할 수밖에 없도록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건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선생은 젊었을 때 재즈 카페의 소음 속에서 자기 영혼을, 자기 글쓰기를 단련해 갔습니다. 그는 자기 안의 어둠을 회피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체 중의 하나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 것은 작가의 필요 조건을 충족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작가는 자기의 어둠 속에서 동시에 세계의 어둠을 보는 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와 부정의, 그리고 폭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작가는 사회의 이러한 어둠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 사회의 가장 깊은 어둠을 폭로합니다. 인간이 어디쯤에서 스스로 파괴되고 타락하는지를 성찰합니다. 

제 생각에, 초기 하루키 소설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추상적이고 모호한 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다릅니다. 하루키 선생은 옴 진리교에 의한 사린 가스 살포 사건을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집요하게 탐색해 왔습니다. 그 끔찍한 범죄, 원천적 무의미가 아마도 일본 사회의 가장 커다란 어둠, 그러니까 인류 전체의 가장 깊은 어둠이라고 생각하는 듯도 합니다. 이번 소설은 그 무의미한 어둠에 대한 하루키 선생의 대답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삶이란 결코 허무할 수 없다는 것, 가장 비참한 고립의 순간조차도 어떤 의미로 가득하다는 것이 이번 작품을 통해서 선생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란 자기의 어둠을 견디면서 동시에 타인의, 사회의 어둠을 드러냅니다. 이는 고귀한 행위입니다. 그는 쉽게 파괴되고 간단히 무너지지만, 결코 이 불편한 희생을 버릴 수 없습니다. 저는 이십 년 동안 책을 만들어 왔지만, 하루키 선생은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옴 진리교가 만들어 낸 어둠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단지 종이와 글자로 된 상품과 만난다기보다는 작가의 영혼이 만들어 내는 어떤 고귀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의 고귀함을 함께하게 된 여러분, 환영합니다.


아래는 강연회 때 찍었던 여러 사진들이다. 마찬가지로 민음사 페이스북에서 가져왔다.


하루키 소설의 숨은 구조를 열강하는 양억관 선생님


자리를 꽉 메운 채 열청하는 청중들


타고난 유머와 폭 넓은 지식으로 좌중을 사로잡은 박종호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