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다음 주에 밀란 쿤데라 전집 열다섯 권이 드디어 완간된다. 1988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계간 《세계의 문학》에 실린 이래 스물다섯 해 만이다. 프랑스어권 바깥에서는 세계 최초로 출간되는 전집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전집을, 그것도 외국 작가의 전집을 간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미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플레야드판 전집이 완간된 데다, 밀란 쿤데라가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에, 더 나아가서 한국 문화에 끼친 공헌을 생각하면 그리 무리한 것도 아니다.

밀란 쿤데라의 문학은 처음 번역 출판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지금 글을 쓰는 한국의 어떤 작가도 결코 그에게 생각의 물줄기를 대지 않은 이들은 없을 것이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한국어 속으로 뿌리를 내렸고, 그로부터 싹들이 나와 많은 꽃들을 피웠다.

밀란 쿤데라 전집을 담당하는 후배 편집자가 쿤데라에 대한 글을 하나 부탁하기에 어제 점심을 샌드위치로 떼우면서 짤막한 글 하나를 썼다. 조금은 공적이고, 조금은 사적인 쑥쓰러운 글이다. 민음사와 밀란 쿤데라와 나 사이의 삼각함수를 푼 기분이다. 여기에 옮겨 둔다. 





밀란 쿤데라 전집을 펴내면서


모험과 도전, 도약과 상승, 책의 세계에서는 가끔 이런 일이 벌어진다. 한 작가가 아주 먼 곳에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고 그가 공들여 써 낸 작품 속 세계가 불현듯 육체가 놓인 이곳의 현실, 한국어로 구축된 현실과 하나로 합쳐져 새로운 세계 자체를 만든다. 기적이다. 

번역된 작품은 모두 이러한 가능성 속에 놓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많은 작품들은 주변을 둘러싼 어둠을 이기지 못하거나 대개 성냥불처럼 순식간에 타올랐다 꺼져 버려 한국어 작품들의 흐름에서 희미한 잔물결 또는 일시적 유행으로 표시되고 만다. 오직 특이한 몇몇 작품만이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한국어 작품의 역사 그 자체가 된다.

체코 출신의 프랑스어 작가 밀란 쿤데라와 민음사의 만남을 우리는 수많은 모험이 중첩된 하나의 역사로서 기념하고 싶다. 그 모험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었다. 대학입학시험 출제위원으로 선발된 중년의 한 교수가 출제 장소에 수용되기 전에 우연히 한 소설을 접했고, 그는 출제 후 한 달 이상의 출입 제한이 가져올 지루함을 견딜 기분으로 그 소설을 가방에 챙겨 들었다. 나중에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가방에는 소설의 번역 원고 뭉치가 들어 있었고, 며칠 후에는 그 상태 그대로 한 편집자의 책상 위에 놓였다. 전혀 낯선 작가였고 완전히 특이한 작품이었다. 

망설임과 불안이 혀들 사이를 옮겨 다녔다. 어쩌면 이 작품은 편집부에서 흔히 그런 일이 일어나듯, 일상적으로 잊힐지 모를 운명이었다. 한 편집자가 어느 날 읽을거리를 찾다가 손에 들고 전철을 탈 때까진. 대학에서 한국 문학을 전공한 소설가 지망생이자 미문의 비평가였던 그 편집자는 단숨에 이 작품에 빠져들었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장들, 집단의 역사가 개인의 일상을 파고드는 장면들의 정확한 디테일, 관념적 사유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도 명랑성과 유머를 결코 잃지 않는 흔치 않은 재능, 이 모든 것이 그의 심장을 쉴 새 없이 두드려 댔다. 문학의 새로운 경지였다. 그는 밤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1988년 가을, 민음사에서 발간하는 계간 《세계의 문학》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실렸다. 서울대학교 독문학과 송동준 교수의 번역이었다. 나는 그때 대학생이었다. 위에 언급한 편집자는 같은 과 선배이자 문학 모임 멤버였다. 함께 문학 지망생이었고 공부를 같이했다. 작품을 읽는 순간 나는 거대한 충격에 빠졌다.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이었다. 학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헛된 투쟁, 민족문학론의 우악스러움에 지쳐서 실의에 빠졌던 한 청년의 가슴에 쿤데라의 이 작품은 세련된 문학에 대한 희망의 불꽃을 심어 주었다. 그러고 나자 갑자기 시야가 열렸다. 도스토옙스키와 카프카와 베케트가 내 문학의 중심으로 들어서고, 프루스트와 마르케스와 보르헤스가 새롭게 다가왔다. 감수성의 중대한 변환이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소설가 김연경의 말처럼, 1980년대의 마지막 몇 해는 문학을 하려는 거의 모든 이들에게는 오로지 ‘쿤데라 시대’로 기억되었던 것이다. 

1994년 나는 민음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중이었다. 프랑스에서 쿤데라의 『느림』이 출간되어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쿤데라는 체코를 떠나 프랑스로 망명해 있었고, 이 작품은 그가 프랑스어로 처음 쓴 소설이었다. 문학적 자유를 확보하려고 과감하게 모국어인 체코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를 택한 것이다. 1993년 한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개정 저작권법이 발효됨에 따라서 저작권 계약 없이도 출판이 가능했던 이전과는 달리 『느림』을 펴내려면 계약이 필요했다. 당시에는 회사에 저작권 담당자가 없었기에 이 일을 외국어 실력도 짧은 내가 맡아서 잠시 처리하게 되었다. 나는 저작권을 대행하던 쿤데라의 아내 베라에게 편집자로서 쿤데라 작품을 읽었던 소견을 솔직하게 써 보냈다. 그중에는 쿤데라의 문장이 서정시적(lylical) 품격을 갖추었다고 한 부분이 있었는데, 베라는 쿤데라가 그 편지를 읽고 무척 기뻐했다면서 민음사에 출판권을 주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책은 김병욱 선생의 번역으로 다음 해 4월에 나왔다. 이 일을 기점으로 쿤데라와 민음사가 정식 계약을 맺고 한국어판을 출간하는 시기로 접어든 것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내 진심이 짧은 외국어로도 전달되었구나, 문학의 세계는 한국과 외국이 별로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밤새 기뻐했던 생각이 난다.

그 후 쿤데라는 체코어 판이나 독일어 판에서 번역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서 자신의 모든 책을 프랑스어에서 다시 번역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송동준 선생이 번역한 판본은 수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 자리를 이재룡 선생의 번역판이 대신했다. 그 후 신작인 『향수』『정체성』을 비롯하여 『농담』 『불멸』 등 이전에 번역된 모든 작품이 민음사로 서서히 모이기 시작했다.

2011년 나는 교정, 디자인, 체제 등이 제각각이었던 밀란 쿤데라의 작품들을 모아서 일관성 있는 편집 원칙 아래 전집으로 출판할 것을 결심하고, 회사의 프랑스 문학 담당 편집자와 상의하면서 이 작업을 위한 계획을 세워 나갔다. 쿤데라는 우리 계획을 듣고 승인해 주었고, 외국에서 출판되기를 원하지 않는 몇몇 작품을 지정하는 등 주의 사항을 전해 주었다. 그해 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비롯한 다섯 작품을 출간함으로써 밀란 쿤데라 전집이 프랑스 바깥에서는 최초로 간행되기 시작했으며, 올해 마지막으로 그의 유일한 희곡인 『자크와 그의 주인』이 출간됨으로써 현재까지 출간된 작품을 모두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사이 밀란 쿤데라는 한국 문학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작품에서 나온 뿌리들은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한국어 속으로 넓게 펴져 나가면서 한국 문화 속에서 새로운 싹들을 틔우고 있다. 사유, 감각, 이야기, 스타일 등 모든 게 새로워졌다. 만남들이 수없이 겹치면서, 땀들이 섞여 흐르면서, 한국어 속에서 새로운 길들이 표시되고 나타났다. 

이 모든 것이 지난 25년 동안 편집자들과 호흡을 맞추었던 여러 번역자 선생님들과 그동안 그의 작품들을 사랑해 주셨던 독자들 덕분이다. 전집 완간의 모든 기쁨을 그분들께 돌린다. 


장은수


밀란 쿤데라 전집


 01 『농담』(방미경 옮김, 민음사, 2011)

02 『우스운 사랑』(출간 예정)

 03 『삶은 다른 곳에』(방미경 옮김, 민음사, 2011)


 04 『이별의 왈츠』(권은미 옮김, 민음사, 2012)


 05 『웃음과 망각의 책』(백선희 옮김, 민음사, 2011)


 06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재룡 옮김, 민음사, 2011)


 07 『불멸』(김병욱 옮김, 민음사, 2011)


 08 『느림』(김병욱 옮김, 민음사, 2012)


 09 『정체성』(이재룡 옮김, 민음사, 2012)


 10 『향수』(박성창 옮김, 민음사, 2012)


 11 『소설의 기술』(권오룡 옮김, 민음사, 2013)


 12 『배신당한 유언들』(김병욱 옮김, 민음사, 2013)


 13 『커튼』(박성창 옮김, 민음사, 2012)


 14 『만남』(한용택 옮김, 민음사, 2012)

15 『자크와 그의 주인』(출간 예정)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