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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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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건져올린 기쁨의 언어 배수연의 첫 시집 『조이와의 키스』(민음사, 2018)는 폭력으로 가득한 슬픔의 세상에서 ‘기쁨’의 언어를 발굴하고 싶어 하는 애처로운 마음을 담았습니다.세상의 표상은 더럽고 위협적입니다. “헝클어지는 머리칼/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 엄살쟁이야/ 주사 맞기 싫으면/ 선생님 뺨에 입을 맞춰 봐” 시 「병원놀이」의 한 구절입니다. 이 땅의 여자들이 흔하게 겪는 일상을 생생하게 포착합니다.하지만 시인은 세상의 폭력에 지지 않습니다. 폭행하는 세계 속에서 시인은 곳곳에서 자아의 기쁨을 흩뿌리고 또 수확합니다.“너의 아름다운 몸이 침대 위에서도 웅크려야 하는지/ 나는 와락 눈물이 안기는 걸 뿌리친 채로/ 세상에서 가장 가느다란 눈썹을 꺼내 네 발에 시를 썼어/ 아니 그건 코란이나 성경이었을지도 몰라”이 시집..
자유를 향한 무섭고 끔찍한 갈망 _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했습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영예를 안은 한국문학의 쾌거입니다. 예전에 경향신문에 썼던 서평을 블로그로 옮겨서 기념합니다. 자유를 향한 무섭고 끔찍한 갈망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어느 날, 불쑥, 마음속으로 문장이 일어선다. 아침을 챙기려고 문득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일 수도 있다. 바쁨과 분주함 사이 올려다본 눈으로 파란 하늘이 끼어들었을 때일 수도 있다. 하루를 지내고 노란선 바깥에서 지하철을 멍하니 기다릴 때일 수도 있다. 아무튼, 무조건, 찾아온다. 삶의 의미를 신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얻지 못하고 스스로 길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현대인은 인생이 습기를 잃어 ..
중2병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한 단상 _오늘의 교육을 읽다가 “중2 때는 무엇 하나 집중을 못한다. 특히 누가 있을 때 더욱 힘들다. 예를 들어 책을 읽을 때 집중하면 힘들다. 왜냐? 주변에서 속닥댄다. 심지어 등굣길에 노래 듣기도 힘들다. 이어폰만 꽂으면 중2병이라고 한다. 나는 발라드를 좋아한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좋아했다. 이것도 중2병인가? 나도 집에서 놀림 받는다. 여자 친구랑 전화하면 중2병, 노래 들으면 중2병, 책 읽으면 중2병. …… 다들 중2 때의 기억을 잊었나?” - 204쪽, 「대한민국에서 ‘학생’으로 사는 것」, 박용희 《오늘의 교육》 29호가 나왔다. 소개글에서 문득 이런 구절과 마주쳤다. 저항의 언어다. ‘중2’를 질병 이름으로 쓰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다. 아이들의 신체와 정신에 가하는 훈육을 감추려고 아이들..
백가흠 장편소설 『향』(문학과지성사, 2013)을 읽다 1이번주 지하철을 오가면서 백가흠 장편소설 『향』(문학과지성사, 2013)을 읽었다. 그동안 죽음 너머를 사유하는 것이 주로 신화나 종교의 일이었다면, 이 작품과 함께 비로소 21세기 한국문학도 그 영역을 넘보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권혁웅이 작품 해설에서 이 작품을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에 빗대어 “죽음의 또 다른 한 연구”(253쪽)이라고 부른 것은 아주 적절하다. 죽음은 이 소설의 처음과 끝을 순환하면서 모든 언어들을 감싸고 있으며, 인물들을 행위로 이끌고 있다. 힘들게 쓴 소설이고 그런 만큼 쉽게 읽히지 않지만, 이 소설로부터 우리 문학은 심오한 형이상학 하나를 21세기에도 형상화할 수 있게 되었다. 2그러나 『향』에서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다. 대개 그 죽음은, 백가흠 소설의 오랜 탐구..
김경욱의 『야구란 무엇인가』(문학동네, 2013)를 읽다 1지난주 지하철 퇴근 시간을 이용해 김경욱의 『야구란 무엇인가』(문학동네, 2013)을 모두 읽었다. 적절한 주변의 소음이 아니었다면 이 끔찍하고 처연하며 아릿아릿한 이야기를 끝내 참을 수 없어서 울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누가 봐도 이것은 김경욱 소설의 새로운 전개다. ‘광주’라는 소재의 심각함에서도 그렇고, 복수와 화해라는 주제의 묵직함에서도 그렇고, 분열증과 편집증이라는 심리의 전개에서도 그렇고, 말더듬과 초단문이라는 발화의 특이함에서도 그렇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김경욱은 갑자기 젊음의 꼬리표를 떼고 역사와 윤리가 교차하는 낯선 영역 속으로 투신해 버린 것이다. 읽으면서 여백에 메모해 둔 것들을 여기에 기록해 둔다. 2그 누구도 복수로서의 광주란 무엇인가를 그다지 열심히 묻거나 탐구하지 않았다.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