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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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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중앙선데이》에 연재하는 에세이. 이번에는 터키의 소설 『살모사의 눈부심』을 가지고 권력에 중독된 ‘괴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채 사랑을 모르는 채로 자라서 황제가 된 소년은 전횡을 일삼다, 정변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간신히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었던 무스타파 1세의 실제 이야기를 소재로 가져다 쓴 작품입니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이 읽으면 좋을 듯해서, 조금 고쳐서 아래에 옮겨 둡니다. 한 소년이 있다. 어린 시절, 잔혹하고 무참한 장면과 마주친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형제가 목에 올가미가 걸린 채, 허공에 발길질을 하다 속절없이 스러지는 것을 보았다. 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율법에 따라 집안 형제들을 모조리 목 졸..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는 책 -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문희경 옮김, 어크로스, 2016) 일반적으로 책은 특정한 방식으로 읽도록 되어 있다. 책을 이루는 문장이 만드는 호흡은 읽기의 속도나 밑줄이나 메모의 유무 등을, 심지어 장소까지도 결정한다. 주말에 시골마을에서 읽으려고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문희경 옮김, 어크로스, 2016)을 챙겨 갔다. 올해 여섯 번째 책으로, 청탁과 관계가 없었으므로 그야말로 자유롭게 읽기 시작했다. 앞머리부터 가슴을 두드리는 문장들이 넘친다.“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 않았다. 누구나 낯선 사람과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공포와 굴복의 기록일 뿐 아니라 위험에 도전한 기록이다. 특히 호기심에 이끌려 저항한 기록이다. 호기심은 빛을 어둠으로 바꾸는 온갖 종류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선의 길이고, 문제를 미세한 분자로 분해해서..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박행산전지댁유제(朴杏山全之宅有題, 행산 박전지의 집에서) 행산(杏山) 박전지(朴全之) 집에서 홍규(洪奎, 1242~1316) 술잔은 항상 채워야 하지만,찻잔은 깊은 것을 쓰지 않는다.행산에 하루 종일 비가 내리니자분자분 다시금 마음을 털어놓으세. 朴杏山全之宅有題 酒盞常須滿,茶甌不用深.杏山終日雨,細細更論心. 이 시를 지은 홍규(1242~1316)는 고려 말의 문인으로, 자신의 매부이자 무신정권의 마지막 실력자인 임유무(林惟茂)를 제거하여 무신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행서와 초서에 뛰어나 글씨로도 일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박행산전지(朴杏山全之)는 벗인 행산(杏山) 박전지(朴全之)의 호와 이름을 같이 적은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호를 지을 때 거주하는 곳의 지명이나 특징을 살려서 짓곤 했는데, 행산(杏山)은 아마도 박전지의 집 근처에 살구나무 숲이..
[오래된 독서공동체를 찾아서] <6> "9년 전 세 친구의 책 선물 나눔… 이젠 커다란 독서모임 됐죠"(보령 책 익는 마을) 프랑스의 소설가 아나이 닌이 말했다. “친구들은 각각 우리 내면에 있는 하나의 세계를 대변한다. 그들이 우리 삶에 도달할 때까지는 태어날 수 없었던 세계들 말이다. 그러므로 오직 만남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계가 태어난다.” 과연 친구란 존재 자체가 기적이다. 홀로에서 둘이 되는 순간, 두 사람을 둘러싼 세상은 근본적으로 변혁된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이 불현듯 도래한다.세 사람이 있었다. 시쳇말로 ‘절친’이었다. 그중 하나가 책을 읽다 친구들한테 선물하고 싶어졌다. 배기찬의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위즈덤하우스)였다. 친구들로서는 어른이 되어서 거의 처음 받는 책 선물이었다. 성의가 고마워서, 각자 읽고 나서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한 달이 금세 지나갔다. 약속했기에 모두 ..
행복에 대하여(에피쿠로스) “행운아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청년이 아닌, 지금껏 잘 살아온 노인이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청춘기에는 자신의 믿음에 확신이 없어 많이 방황하지만, 정박할 항구에 다다른 노인은 자신의 참 행복을 잘 지켜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한 가장 위대한 지혜는 우정이다.” 쾌락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는 에피쿠로스는 사실 행복의 철학자였던 것이다. 나는 그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데, 오늘 《월스트리트저널》 한국어판 기사를 읽다가 문득 위의 구절을 만나고는 이 사람 책을 읽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