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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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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와 정리, 나를 돌보는 실천 봄날 햇볕이 따스하다. ​ 창문을 활짝 열고, 하루 종일 청소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선다. 미세먼지 없는 날을 골라 겨우내 묵은 먼지를 내보내고, 신선한 바람이 집 안을 휘젓게 하고 싶다. ​ 청소기를 돌리고 총채를 들어 구석구석 켜켜로 쌓인 먼지를 쓸고 떤 후, 깨끗한 손걸레에 물을 묻혀서 책꽂이, 소파, 의자, 책상, 장식장 위아래를 말끔히 닦아내고 싶다. ​ 무엇보다 마법이라도 부려서 곳곳에 쌓아둔 책과 음반, 바닥으로 넘쳐흐르는 옷가지, 여기저기 널브러진 잡동사니를 한순간 깔끔하게 정리해 버리고 싶다. ​ 청소는 소(掃, 비를 들고 사당을 정화하는 일)를 행해서 더러움을 씻어내 깨끗하게 만드는 신성한 일이고, 정리는 정(整, 튀어나온 가지를 쳐내는 일)을 행해 우리 삶에 생겨난 어지러움을 청산..
삶의 좌표를 잡으려면 트렌드 책이 아니라 문학을 출판현장에선 요즈음 트렌드 책들을 기획하고 집필하고 편집하느라 한창 분주하다. 한 달 남짓 지나면, 올해를 정리하고 내년을 내다보는 책들이 쏟아질 것이다. 한 해 유행을 어떤 기묘한 언어로 정리할지 무척 궁금하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기술로 인한 변화의 속도는 가파른데, 인간이 이에 적응하는 속도는 완만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기에는 누구나 얼이 빠지고 정신이 나간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를 정도로 열심히 살아가는데, 주말이 다가올 무렵이 되면 ‘내가 뭐 했지’ 하는 기분에 시달린다. 이를 ‘공허감’이라 하는데, 현대의 가장 무서운 질병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리를 알려고 한다. ‘내가 있는 이 순간은 어느 때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21세기 고전] 그래도 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21세기 고전’. 이번애는 이현수의 『신기생뎐』을 다루었습니다. 역사의 밀물에 떠밀리고 있는 근현대사의 잊힌 삶들에 주목하는 이 작가의 성취는 아주 높습니다. 언어의 세밀화가로서 그녀가 그려내는 세계는 정말 풍요롭죠. 이 작품을 비롯하여 『토란』(문이당, 2003), 『나흘』(문학동네, 2013) 등은 독서공동체에서 같이 읽고 이야기하기에 아주 좋습니다. 군산 부용각. 빼어난 노래와 신명나는 춤을 빌미로 여자들이 사랑을 사고파는, 그러다 사랑을 하기도 잃기도 하는 기생집이다. 이현수의 『신기생뎐』의 무대다. 주요 주인공은 넷이다. 소리기생 오 마담, 부엌어멈 타박네, 춤기생 미스 민, 오 마담을 스무 해 동안 외사랑하는 박 기사. 연작소설의 화자를 이루는 사람마다 사연이 절..
헤밍웨이 등을 마저 읽으며 설 오후를 보내다 처가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오후 2시가 다 되었다. 별로 막히지 않은 것 같은데도, 은근히 길에서 시간을 다 보냈다. 문안 겸 어머니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와 간단히 씻고 낮잠을 청했다. 그리고 미루어 두었던 책들을 꺼내 읽었다. 아울러 틈틈이 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했던 기획 좌담 내용을 정리 중이다. 얼마나 말을 많이 했던지 쳐내도, 쳐내도 끝이 없다.『헤밍웨이 단편선 1』(김욱동 옮김, 민음사, 2013)을 거의 다 읽었다. 읽을수록 그동안 내가 ‘하드보일드’라는 스타일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건 다만 문장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어떤 태도를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감정을 배제한 속도감 넘치고 극단적으로 간결한 문체란, 인생에 대한 극한의 허무주의와 같은 것은 아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