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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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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힌 심장 - 궁극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먹은 건 사실 굴리엘모 과르다스타뇨의 심장이었소, 부정한 아내로서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그자 말이오. 돌아오기 직전에 이 손으로 직접 그 가슴에서 잘라 온 것이니 그자의 심장이 틀림없소.” 부인은 그리도 사랑했던 사람의 심장이라는 얘기를 듣고 너무나 비통해져서 할 말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입을 열었지요. “당신은 기사답지 않게 비열하고 극악한 일을 하셨군요. 그분이 내게 강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을 사랑한 것이니 이 일로 당신의 명예가 더럽혀졌다면, 그분이 아니라 내가 벌을 받았어야 해요. 하지만 하늘이여 도우소서. 굴리엘모 과르다스타뇨 씨처럼 그렇게도 훌륭하고 그렇게도 고매하신 기사의 심장 요리를 먹었으니, 내 입으로 다시는 다른 음식이 지나가지 않게 하소서.” _ 조반니 보카..
한 인문 편집자의 질문 『연구자의 탄생』(돌베개, 2022)을 읽는 중. 이 책에는 익숙한 이름들이 많다. 책이든 글이든, 대개 한 번쯤 읽어본 이름들이다. 이들에게 던져진 질문들은 소중하다. 편집자의 표현을 따라 압축하면, ‘나는 왜 이런 연구를 하고 글을 쓰는가?’ 학문 붕괴의 위기에 맞서서 편집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장(場)을 열어서 물음을 던지고, 답을 들어 독자에게 보고하는 일이다. 이 일을 멋지게 수행한 편집자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어려운 기획에 참여해 학문적 지향을 보여준 연구자들에게도.... 책의 내용은 무척 흥미진진하다. 국문학, 영문학, 사회학, 여성학, 인류학, 정보학 등 여러 분야 청년 학자들이 현재의 세상과 학문에 대한 나름의 치열한 고민을 토로한다. 어떤 전선이 짜여가는 모습과 함께 흥미진진..
일의 보람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우리는 보통 반복되는 일을 권태롭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세련된 손기술을 익히는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어떤 일을 계속 되풀이하더라도 그 작업이 예측을 동반하는 방식으로 흘러갈 때는 일하는 사람을 고무한다. 똑같이 반복적인 작업이라도 반복의 내용은 새로워지고, 변형이 일어나며, 향상될 수 있다. 하지만 작업자가 느끼는 정서적 보람은 반복적인 일을 다시 하는 바로 그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 바로 리듬인 것이다. 생리적으로 리듬을 타며 수축하는 인간의 심장처럼, 숙달된 장인은 그의 손과 눈을 쓸 때 리듬을 탄다. _ 리처드 세넷, 『장인』, 김홍식 옮김(21세기북스, 2021) 중에서 ===== 이렇답니다. 나날이 새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
문학 번역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졸라로 이어지는 사실주의 계열의 소설을 번역할 때 가장 먼저 겪는 어려움은 물리적인 어려움이다. 다시 말해 분량이 방대하기에 상당한 시간적 투자와 함께 특별한 집중력을 요한다. 그런데 방대한 분량의 번역에서 주의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말 실력임이 틀림없다. 번역자에게 풍요로운 어휘 지식, 다채로운 문장 구성력이 없다면, 요컨대 300쪽 이상 길게 쓸 문장력이 없다면 좋은 번역서가 탄생하기 힘들 것이다. 프랑스 번역학자 앙투안 베르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낯선 언어의 시련’ 이상으로 ‘낯익은 언어의 시련’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_ 유기환, 「문학번역이란 무엇인가?」, 《악스트》 40호(2022년 01/02호) 중에서 ====== 낯익은 언어의 시련..... 깊은 함축..
인생이라는 게임을 어떻게 치를까 세상의 게임은 대체로 둘로 나뉜다.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이다. 시작과 끝이 분명한 유한 게임의 목표는 승리이고,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 게임의 목표는 게임의 지속 자체이다. 예를 들면, 입사 시험은 유한 게임이고, 인생 전체는 무한 게임이다. 시험 게임에서는 합격이 최선이지만, 인생 게임에서는 한 번 더 시도할 수 있으면 가장 좋다. 예수는 말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혹여 유한 게임에서 승리해도, 무한 게임을 지속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 없다는 뜻이다. 제임스 카스 뉴욕대 교수는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노상미 옮김, 마인드빌딩, 2021)에서 유한 게임의 아이러니에 관해 이야기한다. 유한 게임은 플레이어, 즉 참가자가 승리하면 게임이 끝나..
차별은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가 올해 편집자들이 가장 사랑한 책 중 하나가 『마이너 필링스』(마티 펴냄)이다. 재미교포 2세인 캐시 박 홍이 쓴 이 책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겪는 인종차별 경험과 그로 인해 뒤틀리는 자아에 관한 에세이다. 2020년 미국 출간 직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았다. 자서전 형태로 쓰인 이 책에서 저자는 백인 우월주의 국가에서 태어나서 느껴온 더러운 기분을 예민한 감각과 섬세한 언어로 그려내서 독자들 마음을 사로잡는다. 저자는 그 기분을 마이너 필링(minor feeling)라고 부른다. 소수적 감정, 즉 사회적 차별 탓에 소수자가 느끼는 불쾌하고 불편한 감정이다. 소수자가 이 기분을 느낄 때 다수자는 이를 ‘지나친 예민함’이나 ‘과민반응’ 등으로 폄훼하면서 사소한 것으로 얼버무리곤 한다. 상처 입은 사람이 ..
단어 수집가 녹는점: 시를 쓰며 가장 자주 도달하는 상태. 내게 녹는다는 건 부드러움과 동의어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들. 물속에서 녹고 있는 물고기. 한낮의 태양 아래, 아이스크림보다 먼저 손이 녹아 버린다면? 눈사람에게 허락된 마지막 밤. 흰 사슴의 눈동자가 호수로 변하는 순간. _ 안희연, 『단어의 집』(한겨레출판, 2021) 중에서 ==== 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하는 것이 시인의 주요 임무이다. 이 때문에 대다수 시인이 단어 수집가로 살아간다.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하므로, 민감하게 단어를 모으고 강박적으로 의미를 되새김하는 이 작업은 일종의 정거장이다. 안희연 시인이 모으고, 다시 뜻을 풀이한 이 사전(私典)은 일찍이 김소연 시인이 『마음 사전』이나 『시옷의 세계』에서 보여 준 단어에 대한 열정만큼 흥미롭..
시간에 대하여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 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원천이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의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과거에 혹은 미래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우리의 기억 속에, 우리의 예측 속에 있다. 우리는 영원불멸을 갈망하고 시간의 흐름에 고통스러워한다. 시간은 고통이다. 이것이 시간이다. 이런 특성이 우리를 매혹하며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중략) 시간은 세상의 일시적인 구조이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일시적인 변동일 뿐이면서도, 우리를 어떤 존재로 생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시간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라는 소중한 존재를 선물하고, 모든 고통의 근원인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