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문(雜文)/걷는 생각

미식이란 무엇인가

한 달에 한 차례, 《대전일보》에 쓰는 칼럼입니다. ‘미식의 시대’입니다. 먹방이 인기를 끌고, 이른바 맛집이 넘쳐나죠. 하지만 맛이란 무엇일까요. 명절을 맞이해서 집집마다 음식이 푸짐하겠죠. 맛의 의미를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절판은 세상 모든 맛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우주적 상상력의 요리다. (사진 출처 : 위키미디어)



미식이란 무엇인가


미식의 시대다. 맛집 탐방은 이 시대의 성지 순례요, 먹방은 이 시대의 복음이요, 음식 평론가는 이 시대의 사도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알쓸신잡)이라는 이름의 하찮은 정보 목록에도 음식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무엇이 맛있는 것인가? 

맛의 뿌리는 향토에 있다. 산과 들과 강과 바다로부터 얻은 재료에 갖은 정성을 다하면 충분하다. 흔히 ‘고향의 맛’이라 불린다. 뮈리엘 바르베르의 장편소설 『맛』(홍서연 옮김, 민음사, 2011)에 따르면, 음식 평론가인 주인공이 맛보았던 세상의 온갖 산해진미도 궁극적으로 ‘어머니의 손맛’을 능가할 수 없었다. 

맛의 줄기는 사방의 숙수들이 고심을 거듭하고 경험을 누적해 이룩한 비법으로 세운다. 향토음식의 명가들 또는 종가들이 대를 이어 물려온 맛이다. 한 지역의 응집된 손맛 속으로 변화하는 시속을 오랫동안 쌓아올려 이룩한 맛의 수호성인들. 허영만의 『식객』(김영사, 2003)에 나오는 명인들이 견지하는 그 맛이다.

맛의 꽃은 어떻게 피어날까. 수만 가지 요리와 수백 가지 조리법에 능숙한 달인들이 온 세상에서 실어 나른 재료를 이용해 시간을 아끼지 않고 솜씨를 부리기 전에는 좀처럼 생겨나지 못한다. 세상의 이름난 요리 대부분이 제국의 번영이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곳에서 일어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한테도 천년왕국 신라로부터 지금껏 이어진 ‘맛의 꽃’이 당연히 있을 법하다.

‘신라의 맛’이라고? 홀연히 증발한 듯 실감이 없다. 경주를 갈 때마다 맛집이라는 곳들을 다녔지만, ‘신라 천년의 맛’을 자부할 곳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신라의 맛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로 진화했을 가망성이 높다. 『경주시사』에 따르면, 신라 명말 후, 고려에 귀순한 경순왕을 좇아 신라의 문물과 인재가 모두 개성으로 옮겼으니, 이는 “경주 역사상 공전절후의 획기적인 대사건”에 해당한다. 아마도 이때 왕실 숙수들도 대부분 개성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경주 음식의 천년 정화는 고려 500년을 이어가면서 숙성해 ‘개성 음식’이 된 듯하다. 조선이 건국한 후 한양으로 천도했을 때 개성 음식이 다시 서울로 옮겨서 세월을 견디며 이룩한 것이 조선의 궁중 요리요, 그 갈래인 반가 음식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신라의 맛’이란, 결국 한국 음식문화의 전통 자체인 것이다. 큰 것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이 맛의 특징은 무엇일까. 맵지 않고 짜지 않다. 심심하고 담담하다. 재료로 혀를 즐겁게 할 뿐, 조미로 혀를 미혹하지 않는다. 담(淡),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 무미(無味)의 맛을 좇는다.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에 따르면, 동양에서는 ‘맛없음’이야말로 ‘맛의 도’이면서 ‘삶의 도’임을 알았다.

공자는 말한다. “색칠을 하려면 먼저 바탕이 희어야지(繪事後素).” 색깔과 형태를 먼저 보는 자는 그림을 모른다. 형태의 뚜렷함과 색깔의 강렬함은 바탕이 희어야 도드라진다. “흰색은 색의 근본으로 모든 색깔을 받아들인다.”(『예기』) 여백을 그릴 줄 아는 사람만이 그림의 도에 이를 수 있다.

노자가 그 뒤를 잇는다. “도에서 나온 말이여, 담백하구나, 아무 맛도 없도다(道之出口, 淡乎, 其無味).” 참된 길은 맛이 없다. 바퀴의 중심이 비어 있을 때 마차가 잘 구를 수 있듯, 음식의 한가운데 무미가 놓일 때 음식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도는 자신을 꾸미지 않는다.

우리 음식의 절정 중 하나가 구절판이다. 경주 155호 고분에서 구절판 모양 칠기가 출토된 바 있으니, 이 음식은 신라 이래 요리인 듯하다. 아홉은 우주 전체를 뜻한다. 구절판은 세상 모든 맛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우주적 상상력의 요리다. 이 요리의 중심에 갖은 재료를 감싸는 무미의 밀전병이 있다. 맛없음만이 세상의 모든 식감을, 즉 시고 달고 쓰고 맵고 짜고 고소하고 바삭하고 쫀득하고 부드럽고 단단한 맛을 서로 어울리게 해 준다. 무미의 맛을 모르는 이는 음식의 도를 모른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회는 유미(有味)에 빠져 있다. 인공조미료 문제가 아니다. 요리사들이 갈수록 맛의 강도를 높여 혀를 공격한다. 매운맛을 신맛으로 가리고, 짠맛을 단맛으로 속이며, 조악한 맛을 감칠맛으로 덮는다. 시중에 번져가는 ‘불’을 앞머리에 세운 음식들을 보라. 이 음식들을 먹을 때마다 우리는 화형을 당한다. 몸의 고통을 잠시 잊으려고 뇌가 억지로 분비하는 마약성 호르몬에 중독된다. 이것은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호르몬을 즐기는 중이다. 삿된 미혹이고 감각의 생지옥이다.

“마시고 먹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능히 맛을 아는 이는 드물다(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중용』에 나오는 구절이다. 왜 그러한가. “숨은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은 없음(莫見乎隱, 莫顯乎微)”을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소인의 길은 뚜렷해 보이나 날로 사그라진다(的然而日亡). 교묘한 말과 아양 떠는 얼굴빛에는 진실이 없다. 강렬한 맛으로 꾸민 음식에는 도가 없다. 진리는 어눌함에, 보일 듯 말 듯하고 느껴질 듯 말 듯함에 비로소 존재한다. 군자의 길은 어둑하지만 갈수록 밝아진다(闇然而日章). 좋은 음식에는 맛이 없다. 담담해서 싫증나지 않기에(淡而不厭),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그 맛을 간직한다.

‘미식의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무미 없이는 미식도 없다. 맛집을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묻는다. 무엇이 진정한 맛인가. 맛은 어디로 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