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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걷는 생각

사랑과 정욕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로올리이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나보코프의 『롤리타』(문학동네)의 첫 구절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의 첫 문장을 꼽으면, 분명히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다. 몇 번을 읽어도 울림이 멈추지 않고,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떨림이 지지 않는다.

사랑을 하면 인간의 신체는 예민해진다. 비로소 온몸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게 된다. 혀끝의 미세한 움직임조차 이처럼 선명히 떠올릴 수 있다. 사랑은 우리 신체를 낯설게 만든다. 사랑에 빠지면 몸은 평소와 다르게 움직인다. 사랑이 찾아오는 순간, 등뼈는 곧추 서고, 피부는 일어서며, 핏방울들은 들끓어 오르지 않는가. 

그래서 사랑은 불현듯 찾아오는 ‘달콤한 낯섦’이고, ‘친숙한 이질성’이다. 심장이 새롭게 어떻게 움직이는지, 발끝이 저절로 어디로 향하는지, 눈길이 연인의 무엇을 감지하는지, 하나하나 세밀히 떠올릴 수 없다면, 당신은 아마도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머! 나리, 제 손은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시커먼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인데요. 제발 그 손에 입 맞출 수 있게 해주십시오.” 

몰리에르의 「동 쥐앙」에 나오는 대사다. 이 희대의 유혹자가 보여주듯, 사랑은 연인의 신체 전체를 재발명한다. 사랑에 빠진 이는 연인의 모든 것에서 사랑할 이유를 발견한다. 연인의 무엇을 대하든, 사랑하는 자의 감각은 그 이상, 그 너머를 향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 연인의 가장 못난 부분마저 소중히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당신은 사랑을 감히 입에 담지 못할 것이다.

사랑은 운명처럼 떨어져 인간의 감각 체계 전체를 변용한다. 베르테르는 로테의 작은 한숨에서 죽을 듯 불안을 느끼고, 오셀로는 데스데모나의 살짝 돌린 눈에서 끔찍한 질투를 일으킨다. 트리스탄은 이졸데를 위해 금지된 모험을 기꺼이 수행하며 줄리엣은 로미오를 위해 이제껏 세상에 없던 밀어를 창조한다. 사랑이란 연인 덕분에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가능성이 극한까지 확장되는 일이요, 연인의 모든 것을 알천같이 여기는 사건이다. 

그런데 부유층 자제들이 주로 드나들었다는 강남의 한 클럽에서 일어난 일들은 추악할 뿐이다. 약을 먹여 정신 잃은 여자를 성폭행하고 항의하는 여성한테 주먹을 휘둘렀다는 소식만도 이미 처참하다. 그런데다 승리, 정준영, 용준형 등 입만 열면 사랑을 노래하던 유명 가수들이 카카오톡에서 단체방을 열어 몰래 찍은 여성의 사진과 영상을 돌려보았으며, 문제가 불거지자 경찰이 진상을 파헤치키는커녕 오히려 사건 무마에 나섰다는 보도 내용은 너무나 충격적이다. 폭행으로 감정을 대신하고 돈으로 법률을 사는, 지옥에나 있을 법한 타락의 극단을 억울하게도 전 국민이 산 채로 목격하는 중이다.

일찍이 브레히트는 노래한 바 있다. 

“어떤 이는 한 사람을 만나서 그를 사랑하는데,/ 어떤 이는 사랑하고 싶어서 적당한 사람을 찾는다네./ 어떤 이는 한 사람을 사랑하지만,/ 어떤 이는 사랑하는 일을 사랑한다네./ 앞의 것을 운명이라 하고,/ 뒤의 것을 정욕이라 부르지.” 

사랑의 형태가 운명이 아니라 정욕으로 귀착될 때 한 사회의 도덕은 파멸한다. 우리는 이를 눈앞에서 보고 있다.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이 법을 무시하고 양심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저 가진 힘을 공공연히 행사해 정욕을 채운다면, 사회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 이 사건을 한낱 연예 스캔들이 아니라 그들의 총체적 타락이 선연히 돌출된 사건으로 보고, 한 줌 의혹도 남지 않을 때까지 처리해서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 더 나은 세대를 길러내는 일”(나보코프)의 귀감으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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